기다림의 무게

아이의 속도를 믿는다는 것

by dearMe

"보라카이 한 달 살기 어땠어?"

친구의 대답 대신 나온 건 깊은 한숨이었다. 설레는 여행 이야기를 기대하며 마주 앉았는데, 정작 먼저 터져 나온 건 뜻밖의 고민이었다.

문제는 현지 어학원에서 치른 레벨 테스트였다. 아이는 또래보다 한참 어린 동생들이 가득한 반에 배정되었다고 했다.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평소 문제집을 거의 풀어본 적 없던 아이에게 ‘시험지’라는 형식 자체가 너무나 낯설었을 뿐이었다.

“내가 너무 안 시킨 걸까.”

아이가 뒤처진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친구의 마음은 자꾸만 작아졌다고 했다. 어린아이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아이를 떠올리며 괜히 미안해졌노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집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시험지들이 겹쳐 보였다.




경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키워보고 싶어 우리는 이곳으로 왔다. 학원 대신 들판이 더 많은 곳이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나 역시 학원이나 학습지 대신 학교 수업이면 충분하다고, 아직은 그럴 때라고 스스로를 설득해 오던 참이었다.

빨간 동그라미보다 X표가 더 많았던 날.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방을 내려놓고 간식을 찾았다. 하지만 나는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시험지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책장 구석에 무심히 놓인 학습지 홍보책자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 작은 동네에서도 학습지 선생님이 오가고, 아이들은 학원을 다닌다. 대부분은 엄마가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내린 선택이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었는지 잠시 멈춰 서게 된다.

아이가 노력한 결과라면 점수로 혼내지 않겠다고, 수없이 스스로와 약속해 왔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비처럼 내린 X표를 보는 순간 그 단단했던 결심이 생각보다 쉽게 흔들렸다. 그날따라 시내의 학원 건물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나 역시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못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믿고 싶다. 마음껏 놀고 여행하며, 때로는 지독한 심심함을 견디는 시간이 아이에게는 꼭 필요한 성장의 토양이라는 것을. 창가 비어 있는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겉으로 보기엔 비효율적인 공백 같지만, 어쩌면 그 여백 속에서 아이는 자기만의 질문을 천천히 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기다려주겠다고 말해놓고도 숫자 앞에서 이토록 쉽게 동요하는 마음. 비교하지 않겠노라 다짐해도 타인의 속도가 자꾸만 내 눈을 가린다.

방학이라 거실을 이리저리 뒹굴며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는 아이를 바라본다. 나는 절반은 듣고, 나머지 절반은 아이의 천진한 얼굴을 본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를 앞에 두고도, 나는 왜 점수부터 떠올렸던 걸까.

아이의 속도대로 자라도록 묵묵히 지켜봐 주겠다고, 다시 한번 조용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오늘도 그렇게, 나는 나를 설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