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결혼기념일 선물

아빠보다 먼저 기억한 사람

by dearMe

결혼한 지 내일모레면 15년째 되는 날이다. 사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기념일을 요란스럽게 챙겼지만, 언젠가부터는 “까먹지 않은 게 어디냐” 싶은 정도로만 챙겼다.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든지, 남편은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온다든지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작년 결혼기념일 무렵, 남편 회사가 정말 바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전쟁통 같았다. 남편은 매일같이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회사에 들러야 했다. 퇴근 후에도 노트북을 켜놓고 업무 전화를 받느라 얼굴이 늘 피곤해 보였다. 남편과 같은 회사에서 일했기에 그 분위기가 어떤지 눈에 선했다.

결혼기념일을 일주일 앞두고, 남편에게 어떤 선물을 할지 고민이 많았다. 이젠 필요한 게 점점 줄어들고, 필요하다면 바로 사버리는 나이라 선택이 어려웠다. 아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다 결국 새 잠옷을 사주기로 했다. 마침 잠옷을 바꿀 때도 됐고, 새 옷을 입고 자면 언제나 기분 좋으니까. 힘들게 고른 선물을 리본을 묶어 곱게 포장해 두었다.

하지만 결혼기념일 당일, 퇴근 즈음이면 늘 “지금 출발해” 하며 연락을 주던 남편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아이와 둘이 저녁을 먹고 한참을 기다리다, 작은 종이에 짧은 메모를 써서 선물 위에 얹어 식탁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아들과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회사가 바쁜 걸 뻔히 알기에 난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들은 아빠가 늦게 와서 조금 서운한 듯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며 마지막까지 보챘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탁 위에는 편의점 음식 용기가 놓여 있었다. 새벽에 들어와 허기를 달랜 흔적이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새벽까지 일한 모양이었다. 욕실 앞에 급하게 벗어 쌓아 둔 옷이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어젯밤의 피로와 고단함을.


아들은 눈을 뜨자마자 아빠를 찾아가 “아빠, 결혼기념일 선물은?” 하고 물었다. 남편이 결혼기념일인 줄도 몰랐다고 하자, 아들은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엄마는 선물했는데 아빠는 까먹었어?”라며 따졌다. 정작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쩌면 기대를 줄이는 게 편해진 지 오래였는지도 모른다. 그보다 남편이 얼마나 지쳐 있었을지 짐작됐다. 서운함보다 걱정이 먼저였다. 그렇게 작년 기념일은 지나갔다.




올해는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아들은 작년과 같은 일이 생길까 걱정됐는지, 한 달 전부터 아빠에게 선물을 꼭 사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남편은 되레 아들에게 “내가 결혼한 날인데 왜 선물을 사냐, 네가 나한테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웃으며 큰소리쳤다. 아빠는 장난으로 한 말인데 순진한 아들은 또 그 말에 꼼짝없이 넘어갔다.


그 길로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 선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오백 원, 강아지 똥을 치우면 백 원,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 고사리손으로 모은 동전이 통통 소리를 냈다. 아빠에게 게임 아이템을 선물하겠다며, 며칠을 모아 드디어 목표 금액을 채웠다. 아들은 들뜬 얼굴로 내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들이 웹에서 다시 확인해 보니 게임 아이템 가격이 올라 있었다. 환율이 올랐다며 만 원이나 비싸진 것이다. 아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동안 모은 돈을 꼭 쥔 채,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울었다.


세뱃돈을 보태면 되지 않겠느냐고 달래자 그제야 울음이 잦아들었다. 알고 보니 가격이 오른 게 아니라 검색을 잘못한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아들의 목소리는 설렘이 가득했다. “엄마, 아빠 선물은 게임 아이템하면 되는데, 엄마는 뭐 갖고 싶어?” 힘들게 모은 돈으로 선물을 받는다니 미안하기도 하고, 딱히 원하는 것도 없어 답을 못 했다.

며칠 후, 인터넷에서 스텐 뒤집개가 세일하길래 살까 말까 고민하며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아들이 슬쩍 다가오더니 말했다. “그거 내가 사줄게. 엄마 얼른 결제해.” 그러면서 작은 손으로 꼬깃한 지폐 9,800원을 내밀었다. 결국 아들은 나에게는 뒤집개를, 아빠에게는 게임 아이템을 결혼기념일 선물로 사주었다. 결국 아들의 성화에 못 이긴 남편은 꽃다발을 사 들고 왔다. 십 년 만이었다. 어색한 손에 들린 꽃이 유난히 커 보였다.



식탁 위에는 작년보다 훨씬 작은 상자가 놓였고, 그 안에는 커다란 마음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결혼기념일을 잊어도, 아이는 잊지 않았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선물처럼 내 곁에 온 아이. 결혼기념일마다 나는 그 사실을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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