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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얀 May 10. 2020

죽음과 사랑, 그리고 상상력


 사랑이 타자와 나와의 일치, 혹은 통일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상대에 맞게 나의 모든 퍼즐을 끼워 맞췄다. 그리고 완전한 같음이라는 환상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뒤집어씌웠다. 나라는 세상이 연인을 만나 서로 닮아가며 확장되었듯이, 나 자신을 온 세상으로 확장시키길 바랐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실은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전생이며 후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끊임없이 다른 시간대에 환생을 반복하며 서로가 자기 자신이라는 걸 망각하고 말았다는 아이디어. 아담과 이브는 왜 자신의 몸을 나뭇잎으로 가렸을까?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고 개체화되면서 서로가 하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가 왜 네 원수를 사랑하라 했을까? 왜냐하면 원수는 네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타인과의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렸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아의 연장선, 동일시로서의 사랑이었다. 나는 기둥에 묶인 개처럼 자아라는 기둥에 묶여 빙빙 돌면서 사람과 사람의 경계를 뛰어넘었다고 착각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타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빠진 함정이었다.

 나는 왜 모두가 하나라는 생각에 몰입하게 되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만남은 영원하지 않고 모든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타자와의 합일 혹은 일치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연인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었다. 모든 사람은 죽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죽으며 나도 죽는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내가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큰 고통이어서, 나는 그 고통을 경감시킬 상상을 스스로 창조해냈던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가 단 한 사람의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라면, 실질적으론 아무도 죽지 않는다. 아무도 헤어지지 않으며 소멸하지 않는다. 모두가 반지같이 끝과 끝이 연결된 생을 반복할 뿐이다. 그렇다. 모두가 하나일지 모른다는 상상력은 시작과 끝을 묶어 영원한 죽음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상실과 공포를 무화시켰다. 어쩌면 이 상상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창작물 중의 하나였다. 최초로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이 가진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가상이란 이름의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과거의 내가 죽음의 공포에 맞서기 위해 시간을 해체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일직선으로 각각 흐르는 시간을 반지처럼 시작과 끝을 하나로 이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 결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혼탁해지고 말았다. 현재는 곧 미래의 나에겐 과거였고 과거의 나에겐 미래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햇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할 리 없는 기억을 찾아 헤맸다. 유일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모두가 나의 연인이자 가족이자 전생이자 후생이 되었다. 나는 결국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갇힌 신이 되었고, 결국 내 손으로 내가 창조한 세상을 찢고 나와야 했다. 그러면서 많은 것들을 함께 찢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 특히 고대 문자나 상징에 내가 모르는 창조 원리가 있다는 생각, 추상에 의미를 부여하던 습관을 찢었다. 그리고 신, 그중에서도 유일신이라는 개념을 찢었다. 나라는 개념을 찢었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찢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믿음을 의심했다. 사실 믿음과 망상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비합리적인 믿음이 망상이라면, 그것이 비합리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도 내 자신인데.

 결국 내 자신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는 타자다. 온전한 나란 존재하지 않고 나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외부에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 스스로를 의심할 줄 아는 것. 내려놓을 줄 아는 것. 인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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