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 오타쿠들이 자신의 취향에 대해 비판하면 부들대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취향에 자아를 너무 많이 의탁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는 게 아닌 '좋아하는 게 곧 나'인 것. 이것이 컨셉과 중이병의 차이인 것 같고 오타쿠가 비판에 취약한 까닭이다. 메타 오타쿠는 별 게 아니라 나와 취향을 분리해낼 수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자신과 취향이 분리가 가능하면 비판할 수도 있게 된다. 취향을 자신으로 정체화하면 위험한 것은 취향이 무너지면 자기 자신도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작업에 자아를 너무 의탁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작업이 곧 나'이므로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을 반복하게 된다. 작업이 비판받으면 나 역시 비판받으므로, 온 힘을 다해 방어하게 된다. 사실 예술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일 뿐 작품이 곧 작가 자신인 것은 아니다. 물론 일정 부분 작가의 시선은 저절로 드러난다. 하지만 작가가 드러나는 것이냐 보여주는 것이냐에 따라 타자감각적인 예술과 자아감상적인 예술로 나뉘는 것 같다. 티 나는 것과 티 내는 것의 차이랄까.
자아감상적인 예술은 티를 낸다. 이게 곧 작가 자신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을 티 낸다. 그런데 그런 작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작가 자신의 자아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하지만 원래 자아란 변하고, 변해야 한다. 그런 작업을 20년 넘게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쳐도, 그동안 쌓아올린 자아가 무너지고 다시 쌓는 허무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더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된 지난 이름들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게 될까.
자아에 집중하지 말고 타자를 바라봐야 한다. 정확히는 타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찾아야 한다. 한동안 타자를 보는 것에는 자아가 없는데 그걸 내 작업이라 할 수 있을까, 란 허무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타자를 바라보는 것에는 나의 시선이 존재한다. 고정되지 않는 자아를 붙잡고 있는 것이야말로 허무하다. 내가 특별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계속할 수 있는데 정체화시킨 특별은 허구의 이름이다. 진짜 내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종교를 만들고, 그 종교의 열렬한 신자가 되는 것. 그런데 한순간 신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래서 그동안 바쳤던 모든 제사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다면? 자아는 신과 닮았다.
내가 특별하지 않고도, 대단하지 않고도, 작업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제사상이 아니라 밥상을 차릴 줄 알아야 한다. 아니면 허무감에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럼 그 밥상의 재료를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 그건 세상이다.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그 감각을 포착해서 매일매일 다른 밥을 지을 수 있다. 밥에 내가 들어간 게 아니라 내가 밥을 먹는 것이다. 관념을 먹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그 밥을 나눠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