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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2. 2018

[영화] 덩케르크

'시점과 시간의 치밀한 원근법'

Dunkirk 2017 - 크리스토퍼 놀란



놀란의 영화를 좋아한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재미있는' 영화적 구성을 따라가다 보면, 그저 흘려 보낼 수 없는 어떤 선명한 질문이 점차 부상한다. 그 질문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기보단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면 아득한 영역까지 생각이 흘러가는 즐거운 질문. 그의 영화를 보고 일어설 때는 머릿속에 언제나 작은 상상력의 씨앗이 심겨져 있다. 놀란의 영화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씨앗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아직도 꿈틀거리며 발아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스티지>, <다크나이트>, <메멘토>, <인터스텔라>, 그리고 <인셉션>. 영화의 장르가 여러 번 바뀌어도, 그 씨앗은 언제나 모든 영화 속에 하나씩 심겨 있다가 옮아왔다. 


one week, one day, one hour


간단하게 육해공. <덩케르크>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육군과 해군, 공군의 시점을 그들이 겪고 있는 상대적인 시간을 하나의 서사에 교묘하게 직조해서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기법이었다. 아마도 빠르게 이동할 수록 시간을 느리게 체험한다는 물리학적 모티브에서 착안한 발상이 아닐까 싶은데, 긴장감 넘치는 하나의 평면적 서사 속에 서로 다른 속도를 체험하는 그들의 입체적인 시간이 선형적으로 연대기처럼 나열되는 착시현상을 보고 있자면, 그것을 다루고 있는 감독의 역량에 감탄을 할 만하다. 무심코 지나갔던 폭발 장면과, 추락 장면, 교전 장면 들은 각자의 시점에서 필요에 따라 재등장하여, 마치 시계를 보고 연료를 체크하는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처럼, 관객들이 얽혀있는 시간을 다시금 체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왜 서로 다른 시간을 겪고 있는 걸까(왜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지고 있는 걸까). 간단히 말하면 그들의 병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이면서도 의도적으로 전투보다는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각 병과의 관점에서 그 생존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가장 수가 많고, 느리며, 소모품처럼 죽어가는 육군 보병들. 그들의 공간은 넓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지침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들은 적들의 공격에 가장 무력하다. 그러나 수가 많고 공간적으로도 넓기 때문에, 그들 하나하나가 표적이 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그들에 대한 공격은 막을 수는 없지만 동시에 막연하다. 정신을 차린다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동시에 자신에게 공격이 들어올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그래서 그들은 무기력하다. 영화 초반 해변에서 폭격이 일어날 때 보병들은 건물을 찾아 숨으려고 달리거나 물에 뛰어들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파편을 피하려 일제히 엎드릴 뿐. 그리고 운 없이 죽은 사람들을 두고 다시 일어나 줄을 설 뿐. 공격을 피하기에, 그들은 너무 느리고 광범위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존이란 일종의 운명적인 영역일 것이다. 


해군(징집된 민간 어선까지 포함하여)들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그들은 일단 표적이 된다. 그들은 '배'라는 가시적인 구심점에 '응집'되어 있으며, 그것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도 분명하고 위협적이다(어뢰와 폭격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들은 뭉쳤기 때문에 죽을 수 있다. 고향으로 무사히 살아가기 위해서 배를 타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들에겐 그 정도의 속도가 필요하지만 그 속도를 얻기 위해서 불확실한 영역의 죽음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한 지침이 비교적 선명하다. 언제든 침몰할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해서, 선외로 빠져나갈 수 있는 입구를 체크해두는 것. 기름이 묻은 사람을 선내로 숨기는 것. 그리고 기울어가는 배에서 빨리 바다로 뛰어내리는 것(그리고 결국 덩케르크 해변으로 돌아가는 것). 소규모 분대가 생존하기 위해 좌초된 어선으로 몰려드는 것처럼, 얼핏 조금 더 높은 생존의 길처럼 보이는 그들의 공간은 그러나 분명한 죽음의 위험 또한 존재한다. 


공군의 경우는 특별하다. 그들은 죽음에서(전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빠른 속도를 가졌고, 모든 생존이 한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 공격시, 탈출시에 대한 지침도 누구보다 분명하게 정해져 있을 것이다. 지상에서 허무하게 운명적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에 비하면, 가장 숙련된 고급 인력인 비행기 조종사는 얼마나 안전해보이는가. 그들이 전장에서 생존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아닐까. 블랙홀처럼 병사들의 죽음의 영역으로 무한히 빨아들이는 덩케르크에서 탈출하기 위해 배에 아둥바둥 매달리는 지상의 병사들의 생존 이야기는, 영공을 빠른 속도로 넘나드는 그들에게 별로 공감가지 않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그들은 단 한명이다. 죽음의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농담을 할 수도 없고, 노련한 동료에게 자신의 생존을 맡겨볼 수도 없다. 결국 (거의)모두가 덩케르크를 빠져나가는 마지막 승리의 순간에, 오히려 적진에 홀로 고립되어 포로가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늘에서도, 지상에서도 결국 그들은 혼자이다.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느린 시간을 보내는 하늘은, 어쩌면 가장 고독한 공간일 수도 있다.   


'생존'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상이한 시간과 속도를 가진 세 가지 시점을 하나의 2차원적인 서사에 입체적으로 묶어낸 치밀한 원근법. <덩케르크>라는 영화가 가진 미덕일 것이다. 저마다 다른 양상의 긴장감은 덤.  


그러나 놀란이? 


하지만 나는 놀란에게만은 좀 더 다른 것을 기대한다. 꽤 근사한 형식적 시도를 보면서도, 초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첫 장면과, 시간이 정지한 듯 비행운을 뿌리며 아름답게(?) 추락하는(혹은 프로펠러를 멈추고 하강하는) 전투기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이 영화가 그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라는 것을 한 시도 잊지 않으며, 더, 더, 무언가를 더 요구한다. 내가 언제나 놀란의 영화에 끌리던 그것. 질문이라는 것이 <덩케르크>에는 부재해 있다. 


영국 어선들이 징집에 응해 이번에는 자신들이 병사들을 구하러 덩케르크의 해변에 몰려드는 뭉클한 그 장면. '영국'이란 나라와 '어선'이라는 민족적 정신이 스며들어 있는 그 상징, 그리고 성큼 다가온 그들의 'home'. 그 장면을 보면서 '구선이다아'를 외치며 낯뜨거운 민족정신을 불필요하게 강조하던 <명량>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것은 왜일까(명량을 재미있게 봤지만 아무리 양보해도 그 장면만은 납득하고 싶지 았았다). 


감동적인 장면을 감동적인 음악과 함께 보여주면서도, 그때마다 금방 음악을 멈추고 불안한 긴장을 뒤에 배치하며 여운을 의도적으로 소거하는 그 편집적인 시도는 싸구려 신파로 빠지지 않기 위한 놀란의 의식적인 발버둥일까, 아니면 신파조차 도구로 이용하려는 그의 알 수 없는 어떤 시도였을까. 


튀기는 피와 터지는 창자와 날아가는 발목 따위가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는 '첫장면'이 보여주듯이 전장의 생생한 현장감보다는 오히려 '이미지'에 치중한 영화다. 만약 전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려보려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유일하게 '생존을 향한 병사의 심리'에 주목했다는 것에서 그럴 뿐이다. 그렇다고 도망자 신세의 병사들의 낙담을 고국이 환영한다는 메시지로 따뜻하게 감싸안으려하는 그 포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시도가 정말 '놀란'의 영화인가? 


누군가는 놀란의 새로운 시도를 환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놀란이 자신의 눈부신 장점을 버리고 선택한 이 보편적이고 낡은 메시지를, 그의 의미있는 형식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이기에, 다음 영화든 다다음 영화든, 또다시 내게 그 즐거운 질문을 심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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