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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2. 2018

[영화] 400번의 구타

'아이들이 다니는 길'

Les 400 Coups 1959- 프랑수아 트뤼포



세상에는 아이들이 다니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어른의 허리 아래 정도 높이고, 인도와 차도 같은 직선적이고 상식적인 구분 없이 구불구불하게 제멋대로 이어져 있다. 


이 길은 보통 어른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 

긴 코트를 입고, 핸드백을 들고, 각자의 용무에 따라 품위있게 정해진 거리를 걸어다니는 어른들에게 있어서 그 길을 지나다니는 아이들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아이들이 천방지축 날뛰며 자신들의 길을 막을 때마다 그저 차도를 지나가는 양떼를 기다리듯 웃음을 짓고 느긋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아이들이란! 그들의 머릿속 말이 들리는 듯하다. 어른들에게 있어서 아이들이란 언제나 예외상태이며, 보호해줘야하고, 흐뭇하게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의 성장에 알맞은 것들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종종 어른들은 아이들이 '성가시다'. 특히나 제어하기 힘든 그들을 교육해야 할 임무를 가진 선생과 부모들은. 그들이 아이들을 훈육해야할 곳은 보통 어른이 자신 하나뿐인 '밀실'이다. 다른 눈이 없는 곳에서 그들은 종종 아이들의 뺨을 때린다. 그들이 정해진 곳으로 다니지 않고, 하지 말란 것을 했으며,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는 확신을 주지 않으므로. 


예외상태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 아이들은 언젠가는 직선으로 다니는 법을 배워야 하며, 호각소리에 맞춰 질서있게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다니는 길은 사실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국 아이들이 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소리를 지르고, 뺨을 때리고, 때로는 달콤한 보상을 걸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수용소나 마찬가지인 시설에 보내버리더라도. 


자유롭게 자신들의 길을 다니던 아이들은 몸부림치며 반항하지만, 그들을 조여오는 족쇄는 그럴수록 점점 더 무겁고 가혹해진다. 그들을 교조시키려는 '구타'는 끝이 나지 않는다. 400번, 그 이상이라도. 


자유


아빠는 앙트완이 '너무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앙트완이 그렇게 많은 자유를 가지고도 그것을 제대로 제어할 줄 모르니, 이제는 그 자유를 조금 제한할 때라고. 그것은 얼핏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학교를 땡땡이치고, 가출하고, 영화관에 다니고, 놀이기구를 타고, 술과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타자기를 훔치고, 집에 불을 낼 뻔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을 개선할 의지가 없어보이는 아이의 날뛰는 자유를 참다참다 조금 제한하는 정도는, 조금쯤 말을 잘 들을 수도 있었을 아이가 결국 자초한 일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아이를 제어의 대상으로 보는 순수한 어른의 시선이다. 애초에 아이에게 '자유'라는 것이 주어졌던 적이 있을까? 가기 싫은 학교에서 배워야 할 이유를 모르는 학문(특히나 시 외우기)을 공부하기 위해, 하루와 일년의 대부분을 습관처럼 학교에 가야하고, 지각과 탈출에는 가차없는 처벌과, 내키지 않는 과목의 성적에 따른 모욕이 칼같이 따라오는 곳에서 의문에 대한 대답 없이 하루하루 수긍하는 척하며 살아가는 것. 아이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영원한 형벌에 처해 있는 상태다. '자유'라는 것은 그 긴 형벌의 시간 중 아주 일부에만 담뱃불처럼 깜빡이다가 사그라드는 발버둥에 불과하다. 


모든 교육에는 '모르는 자'와 아는 자'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모르는 것은 아이들이고, 아는 것은 어른이니,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살아가는 법을 모른다.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 나중에 형편없는 일이나 하며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그들처럼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면 말이다. 


하지만 앙트완을 보자. 그는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걸까. 나는 <400번의 구타>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앙트완의 손놀림(꼭 '손'이 아니더라도)이었다. 조그만 아이의 손. 그러나 화로의 이중 뚜껑을 여닫고, 아빠에게 달걀을 꺼내주고, 훔친 우유의 뚜껑을 따고, 채 열리지 않는 방문을 열고 침대를 훌쩍 넘어가고, 좁은 잠자리에서 침낭을 끌어올리고, 구겨진 지폐를 펴는 그 손(몸)놀림들은 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야무지고 찰(?)졌다. 


아이의 것? 내 시선엔 이미 편견이 있었다. 그 손놀림은 어른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환경에 나름대로 잘 적응한 개체의 익숙한 몸짓이었고, 이미 충분히 설득력있고 아름다웠다. '아이들의 길'이란 본능이 내키는대로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구 날뛰는 작은 존재들의 위험한 길이 아니라, 부족한 정보와 경험에도 나름대로 자신의 작은 몸을 가지고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합리적인 몸짓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결코, '아무 이유도 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에서 비싼 물건을 들고 잘난척 하는 아이는 아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놀림받아야 하며,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선생들은 조롱받아야 하고, 엄마의 바람은 가정의 사소한 평화를 위해서 모른척해야 하며, 가정과 학교의 억압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면 기회를 노려 잠시 그곳을 탈출하기도 해야 한다. 배가 고파서 생존의 위협이 오면 영양가 높은 우유를 훔쳐 마셔야 하고, 몰래 숨어든 인쇄소에서, 친구의 집에서, 어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기도 한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기준에선 지극히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의 규칙이 어른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앙트완은 발자크에게서 구원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것은 뭐랄까,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도 좀 고상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좋다, 적어도 앙트완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아직 표현할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나름대로의 표현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발자크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 자신의 숙제를 했던 것은. 그러나 그것은 앙트완 자신이 생각했던 존경하고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한 표현의 방식이었지(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무언가를 복제하는 것을 즐긴다, 유행의 형태든, 소유의 형태든), 결코 점수를 잘 받거나 골탕을 먹이기 위해 선생을 속이려는 표절은 아니었다. 선생이 발자크의 글 일부와 거의 똑같은 앙트완의 숙제를 줄줄 읽는 순간에도 끝까지 그것은 베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앙트완의 진심은 그런 것이었다. 진심이 아니었다면 자기 방에 나름대로의 발자크 제단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니. 


'아이들이 다니는 길'이란 이런 것이다. 때로는 그 길이 너무 낮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높은 곳에서 입과 귀를 통해 아무 말이나 대수롭지 않게 나눈다. 아마 낮은 곳을 지나는 아이들이 높이 때문에 잘 듣지 못하거나, 혹은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 길에는 분명히 어떤 논리와, 치열한 생존의 싸움과, 생각보다 멀리 들을 수 있는 귀가 존재한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모두 듣고, 그저 나름대로 판단한다. 단지 그곳의 교통법규, 혹은 '룰'이 조금 다를 뿐이다. 


앙트완은 집에서 탈출하고, 학교에서 탈출하고, 시설에서 탈출해서 결국 바다로 간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마침내 어떤 '자유'에 도달하게 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혹은 그렇게 만들어 졌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앙트완은 스스로의 다리로 그런 황량한 공간에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다니는 길을 인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는 그 폭력, 원하는 바가 이루어 질 때까지 그치지 않을 그 '400번의 구타'가 마치 길고양이를 몰아내듯, 그들을 그런 곳으로 잔혹하게 몰아간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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