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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5. 2018

[영화] 매드맥스

'백지 위의 순도 높은 미친놈들'

Mad Max:Fury Road 2015 - 조지밀러



아포칼립스 - 허락된 SF 


작가나 감독 같은 창작자들에게 있어서 '종말' 이후의 세계는 다루기에 즐거운 소재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룬 여러 작품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포칼립스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고유한 특징이자 매력 요소가 되기도 한다. 


종말 이전의 세계에선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총체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배경과 사건, 설정 등은 현재의 세계의 법칙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서사와 설정을 제한한다. 서사는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세계 안에서 흘러가야하며, 항상 개연성이란 룰의 감시를 받는다. 개연성은 총체성의 파수꾼이다. 


종말이란 그런 것들로부터의 탈출이다. 세계의 법칙은 종말과 함께 무너지고 이제 총체성이니 개연성이니 하는 것들은 헌신짝 버리듯 버려진다. 세계가 깨끗하게 밀어진 이후에 새로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개연성에 구애받지 않는 참신한(그로 인해 억압되었던) 설정들이다. 다시말해 종말이란 '세계의 백지화'이며 그 백지 위에선 작가의 순도 높은 '스타일'이 드러난다.

 

종말이라는 암울한 소재에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등에 짊어지고 살았던 그 모든 '세계'라는 법칙의 억압과 총체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혹은 독자)은 세계의 법칙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길 스스로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관대해진다. 그것이 현실성이 있는가,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기보단, 새롭게 드러날 스타일에 주목하게 된다. 작가는 그저 '생존(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과 관련한 몇 가지 개연성만 보여주면, 그 이후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마음껏 펼쳐낼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에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다. 


우주나 바닷속 같은 동떨어진 배경으로 탈출할 필요도 없다.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는 사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우리의 세계이며, 단지 특정한 사건 이후에 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메시지도 굉장히 선명해진다.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덜어 냈으니 구구절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바로 할 이야기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알리바이는 마련되어 있다. 이건 종말 이후의 다른 세계의 이야기야. 그러나 사실 결국엔 종말 이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간극에서 오는 묘미에서 이 장르의 매력이 있다. 


사막 위의 워보이


<매드맥스>의 세계는 어떨까. '액션 영화'라는 분류로 종종 소개되기는 하지만 단지 그 말로 끝내버리기엔 이 영화는 아쉬운 점이 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과 재미를 가져다주는 요소는 쾅쾅 터지는 폭발과 빗발치는 총알에서 오는 액션감이 아니라(물론 어느정도는 있겠지만 이런 액션이야 흔하고 흔하다), 그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설정'들이다. 즉 '설정 영화'라는 것이다. 


자폭 직전 발할라를 위해 입에 뿌리는 은색 스프레이, 

무기차, 추격차, 기름 수송차, 장대차, 고슴도치차 등 온갖 종류의, 목적성을 가진(그러나 헤비메탈적 스피릿을 놓치지 않는) 자동차들, 

고래 사냥법을 연상시키는 폭약이 끝에 달린 작살 무기,

손가락을 교차시키는 하얀 피부의 무장한 대머리 워보이들.


종말 이후에 세상을 점령한 것은 '스타일'을 철저하게 갖춘 워보이들이다. 이 영화는 그들의 '스타일'을 감상하기 위한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설정들은 영화의 후반부까지 밀도있게 소개되고 활용된다. 이 설정들은 개연성(생존과 관련한)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개연성이 없다. 이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헤비메탈 스피릿을 놓치지 않는 멋쟁이들'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매력적이다. 도대체 콘서트를 방불케하는 사운드 시스템을 갖춘 헤비메탈 공연차는 왜 존재하는 거야. 그러나 전자기타 사운드가 없으면 적막한 사방을 배경으로 모터소리나 텉털털 내며 바퀴를 굴리는 지루한 장면만이 있었을 것은 자명하다. 백지에 헤비메탈을 그려넣은 상상력이 이 영화의 생명력이다. 


메시지는 사실 뻔하다. 물을 차지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세력과 퓨리오사의 저항,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것들. 시리즈물이라 그런지(영화를 보고 나서 알았다) 해소되지 않는 요소들(맥스를 부르는 어린 여자아이의 환영)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메시지는 그 '설정'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은 어떻다, 혹은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작위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감독(작가)과 받아들이는 관객(독자) 사이에 오고가는 진짜 메시지는 사실 그런 것들일 수 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눈에 무엇이 보이는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눈을 감으면 무슨 장면들이 지나가는가. 그것이 작품의 진정한 감각적인 메시지이다. 케이크 위에 건포도가 한알 올라갔기 때문에 이름이 '건포도 케이크'인 케이크를 퍼먹으면서, 우리는 실상 무엇을 먹고 있게 되는가. 건포도인가? 혹은 케이크인가. 미학은 '케이크'에 대해서도 말을 할 수 있어야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매드맥스>는 얼마나 풍부하고 매력적인 케이크 빵을 마련해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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