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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1. 2018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아득해지는 도미노 현상'

君の名は。2016 - 신카이 마코토

 



'만약'이라는 도미노 


세계에 존재하는 법칙을 하나 살짝 무너뜨리는 것. 거기서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즐거운 상상력의 도미노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어느날 누군가와 몸이 바뀐다면?'이라는 작은 도미노 블록을 하나 건드렸을 뿐인데, 물결치듯 무너져내리는 서사의 도미노를 보고 있으면 그 시작의 사소함과 결과의 웅장함에 눈이 즐거워지는 것이다.


실제로 <너의 이름은>은 '눈'이 즐거운 영화다. 극장판 일본 애니메이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춤하는 사이, 이제 극장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보스로 신카이 마코토가 떠오르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애니메이션(우리의 머릿속에 종이에 그림을 한장 한장 그려서 팔락거릴 것이라 떠오르는 그)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화사하고 세밀한 작화에 있지 않나 하는데, 그렇다고 단순히 '그림체가 좋은 애니메이션'에만 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마을 축제에 간 미츠하의 눈에 비치는, 하늘에서 거대한 구름과 함께 떨어지는 혜성의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에 전율했던 것은 단지 혜성의 실감나는 시각적 표현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혜성이 직격으로 떨어지는 곳은 '상상'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교하게 얼기설기 엮이고 있는 서사의 한복판이었다. 바로 그점 때문에, <너의 이름은>은 그 수려한 작화가 단지 외적인 장점으로 존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도미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세계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도미노로 이루어져있다. 그 도미노의 방향은 처음부터 정해져있고, 일단 쓰러지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단 하나의 그림을 제공한다. 그건 자연법칙이라고 할까, 개연성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 개연성이 틀어지는 것을 보통 견디기 힘들어한다. 개연성이 틀어진 것을 보면 그걸 그저 허무맹랑하다든지, 현실적이지 않고 쓸모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동시에, 우리는 언제나 상상한다. 개연성이 뒤틀린 어떤 세계를. 아주 오랜 시간을 거치며 우리는 매 순간 '만약'이라는 즐거운 단어를 놓친 적이 없었고, 모든 창작물들은 그것이 창작물이라는 그 정체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 허구였다. 우리는 세상에 없는 것을 원해왔다. 상상했고 만들었다. 왜? 그것이 원래라면 보였을 도미노의 무늬와는 다른,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은 사실 두 개의 도미노를 건드린 작품이다. 누군가와 몸이 바뀐다는 (흔한)설정만이 존재했다면 아마 이 작품은 타키가 자신과 바뀐 미츠하의 가슴만 주물럭거리는, 뭐 그런 삼류 동인지 정도의 이야기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탄스러운 것은 타키와 미츠하 사이에 토쿄와 이토모리 사이의 거리 뿐만 아니라 3년이라는 시간 또한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들며 좀더 복잡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이제 타키는 미츠하라는 여자아이를 만나려는 것을 넘어서, 존재를 더듬어가기 시작한다. 


두 개의 도미노를 건드렸다고 해서, 세계의 모습이 그렇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타키와 미츠하에게 떨어지는 운석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는 아주 조금 바뀐 개연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생기는 일들, 즉 미키와 타키 사이의 좁아진 거리, 핸드폰 메시지와 얼굴 낙서 등의 유쾌함, 츠카사 얼굴의 홍조,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의 삶, 타키와 미츠하의 만남 등의 새로운 무늬들을 보는 것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그냥 원래부터 미키와 타키가 가까운 사이였고,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이 살아남을 운명이었고, 츠카사가 타키의 수상한 관계가 있는, 타키와 미츠하가 만날 운명인 세계의 무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만약'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아득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이 단순히 눈앞에 벌어진 어떤 사건 뿐만 아니라, 나비효과처럼 뻗칠 저 너머 어딘가의 막대한 변화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만약 도미노 조각 두 개를 바꾼다고 해서 전혀 다른 색의 그림이 펼쳐진다고 한다면, 도미노란 얼마나 환상적인 게임이 될까. 


충실한 애니메이션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두 개 보았을 뿐이지만(<언어의 정원>까지), 장점만큼이나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가 충실하게 애니메이션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작품엔 만화적 클리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언어의 정원>도 마찬가지였지만, <너의 이름은>이 잔잔함을 넘어서는 어떤 에너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아쉬워지는 특징이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적절한 마무리나 감동을 위한 '종지감'을 확보하기 위해서인지, 여느 애니메이션 서사에서 자주 쓰이는 특징들(다급하게 달려간다, 자전거를 내팽겨치거나 넘어졌다 일어나면서 달려간다, 마주친다, 스쳐지나간다, 큰 일을 해결하기 위해 친한 녀석들과 부산하게 움직인다, 눈물을 흘린다)을 쉽게쉽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점이 <너의 이름은>이란 좋은 작품을 '특별한' 작품이라고까지 생각하기를 망설이게 했다. 흔히 있곤 하는 인물의 동선들, 인물의 감정에 동화되는 기상 상태, 에측가능한 감정 표현법 등을 꼭 선택해서, 그것의 장르적인 특성을 순진하게 강화시켜야만 했을까.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사의 혜성을 불쑥 던져놓고, 그렇게 마무리까지 단정하게 길을 닫아놓아야만 했을까. 관객들은 이제 궁금하지도 않은 서로의 이름을 눈물범벅으로 서로에게 묻는 장면으로 끝나야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관객들이 익숙한 종지감을 느끼며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지금보다는 조금만 더 심술을 부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혼잣말을 했다. <너의 이름은>이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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