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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an 22. 2021

소년이 소년에게

[81~82일차]

언제나처럼 탑정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려니 집에서 소식이 하나 날아온다.


아버지께서 간밤에 허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허리디스크로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주 오래 전의 일을 떠올린다.


초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 그랬던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는 그때도 허리가 아팠다. 끙끙 앓으면서 침을 맞니 말린 지네를 사서 끓여 먹니 하다가, 결국 입원해서 수술대에 올랐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분간을 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 나는 그냥 뭔가 굉장히 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어른들은 내게 자세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다). 수술을 하러 들어가면 무조건 배를 째고 어떻게 하는 줄 알았다. 활동적인 체육교사이고 모임에서 축구를 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차원이 다른 실력으로 활약하던 아버지가 수술을 당해야(?) 한다니, 더 이상 예전의 아버지로 돌아오지 못하는 줄 알았다.


당시에 버스나 지하철도 제대로 못 타던 나는 어느날 혼자서 입원한 아버지의 문병을 가야할 날이 있었다. 직장일에 매여서 나올 수 없는 어머니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알려준대로, 지하철인지 버스인지(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를 어떻게 어디서 갈아타고 마침내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혼자서 도착했다.


아마도 늦은 저녁이었다. 불이 반쯤 꺼진 병원 로비의 천장은 하늘처럼 높았다. 끝을 알 수 없이(작고 어린 내 시점에서 보자면) 높이 솟은 기둥들 사이사이에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 좌석들이 있었다. 나는 거기 어딘가에 걸터 앉아 무언가를 기다렸다. 아마도 데스크의 누군가에게 말하고, 안내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반쯤 어둡고 고요하고 높고 넓은 로비의 공간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벽에 걸린 먼지 쌓인 그림 액자. 어둠 너머에 어디론가 통하는 계단. 어디론가 통하는 복도. 그 끝 멀리 보이는 창백한 형광등 불빛.


어째서 마침내 들어간 아버지의 병실과 환자복을 입고 있었을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그 로비에서 하염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던 기억만이 지금 내게 남아있는 것일까. 지금도 종종 여행을 하며 마주치는, 그런 기둥이 있는 높고 웅장한 건물의 내부에서, 나는 어딘지 모를 서글픔과 불안감을 느낀다. 어둠 너머에 있을 불길한 소식,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불길한 소식이 찾아오기 전의 어둡고 고요한 침묵.



다음날 출근을 하고 아침조회를 하기 전에 통화를 하면서 아버지의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이어서 어머니는 말한다.


'진정하고 잘 들어.'


그 말처럼 사람에게 불안감을 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오른쪽 다리가 마비됐단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 말을 듣기 이전의 세계와 한순간에 단절되는 것을 느낀다.


던져진 말은 돌이켜지지 않는다. 언제나와 같은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지나가던 터키인 친구들이 '귀나이든'하며 아침 인사를 하고, 반장님들과 알바생들은 바람이 오늘은 어떻다니 평소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들과 함께 탑으로 출근하기 위해 배를 타러 터벅터벅 걸어가고.


내 물리적 일상은 변한 것 하나 없는데, 귀에 잠시 들렸던 그 말 한마디로 인해 무언가가 달라졌다. 메고 있는 안전벨트나 구명조끼보다도 더 묵직한 뭔가가 가슴인지 머리인지 어딘가에 응어리져서 마음껏 숨을 쉬기가 어렵다.


아버지의 수술은 잘 되었다. 그러나 수술하기 이전부터 허리통증과 함께 오른쪽 다리에 마비 증상이 있어 왔다고 했다. 교직에서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친구의 회사에서 하수도 정비 일을 하며 종종 텃밭을 꾸미는 낙으로 살던 아버지는 예전부터 허리 통증이 조금씩 조금씩 심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고 텃밭에 울타리니 정자니 연못이니 이것저것 만들면서 힘을 썼다.


아픈 것이 있어도 티를 내지 않으려 하던(수많은 우리들의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점점 아파오는 허리와 조금씩 마비되는 느낌이 있는 다리로도 최근에 텃밭에 커다란 흔들의자 그네를 하나 만들었다. 아주 예전부터 그런 그네를 하나 갖고 싶었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나무를 사고 운반하고 해서 기어코 그걸 만들어 어머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줬다.


어쩐지 너무 서두르더라니, 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점차 악화되는 자신의 몸의 상태를 보며 아버지는 두 번째 허리 수술을 예감했을 것이다. 아픈 것을 꾹 참아가며 어떻게든 만들어놓고 입원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아버지의 상태를 더 악화시켰을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허리디스크의 수술은 잘 끝났지만 오른쪽 다리의 마비는 이 수술로 고칠 수 없고 '영구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선고하는 문장 앞에서 지구 반대편 300미터 탑의 꼭대기에 덩그러니 있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있을 때는 평화롭게 흘러가던 일상들이 하필이면 내가 떠나온 순간, 이 짧은 6개월의 기간동안 무너지진 않을까. 그러면서도 겨우 6개월일 뿐인데. 그 사이에 설마, 하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겨우 3개월만에 내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왜 이런 일들은 하필이면 떠나온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날까.


일이 없는 한가로운 날이다. 탑 꼭대기로 올라오긴 했지만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딱히 할 일이 없다. 탑정의 기계 앞 플라스틱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바람에 대비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기껏 마음껏 쓰라고 새해 첫날 떡국내기 핑계로 보내드렸던 백만원은 검사비와 입원비로 들어갔고, 나는 수술비로 일단 쓰라고 지금까지의 월급을 모조리 보내드렸다. 수술이 끝난 후 병실에서 회복하고 있을 아버지께 문자를 보낸다. 문자를 보내다보니 그제야 실감이 나서 눈물이 좀 난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나이를 먹은 지금까지도, 어디 근처에 간다고 하면 꼭 차를 태워 주시던 아버지다. 덕분에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버스 하나 제대로 탈 줄 몰랐지만, 나는 그걸 과보호니 뭐니 하고 생각하기보다는 무척 귀한 아버지를 만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귀한 아버지 덕분에 나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어느날에 일찍 잃어버렸던 소년을, 좀 오랫동안 누리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이제는 나도 그것을 놓아주어야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 때문에 결국 작업을 하지 않기로 해서, 우리는 모두 탑 하부로 내려온다. 날씨는 맑고 바람은 점점 세진다. 컨테이너 사무실에 대기하다가 바람을 쐬러 나온다. 무척이나 한가롭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가만히 바다를 보다가 이동하는 돌고래 무리를 발견한다. 공사를 하다 보면 종종 본다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돌고래를 오늘 같은 날 처음으로 보게 되다니. 나는 한동안 다른 생각을 잊고 돌고래들이 수면 위로 덤블링을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다섯 내지는 일곱 마리 정도의 돌고래들은 주탑으로 가까이 왔다가 멀어졌다가 하더니 곧 사라진다.


할 일이 없어서 조기퇴근을 두고 K차장님과 내기를 한다. 알바생 셋이 모두 가위바위보로 그를 이기면 우리를 조기퇴근시켜 주겠다고 한다. 전혀 기대도 안했지만 Y가 처음으로 이기고, 다음으로 내가 이긴다.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U는 당황하며 모두가 지켜보는 긴장감 속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진다. 잠깐 기대감으로 들썩였던 분위기는 다시 식어버리고 날씨 좋고 바람 불고 사무실에서 대기하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나는 덕분에 잠시 웃는다. 잠시 웃다가, 그렇게 웃는 내가 낯설게 느껴진다. 멀리서 웃는 나를 지켜보는 느낌.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갑자기 잡힌 터키 출국 날짜에 맞춰 서둘러 뺀 내 서울 자취방의 짐을 가득 차에 싣고 집으로 내려가던 모습이었다. 아무리 단촐하게 살았다고는 해도 한 사람의 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이삿짐인데, 혼자서 짐을 내리고 옮기고 하려면 무리일 거라고 해도 너는 그냥 터키로 빨리 가기만 하면 된다, 내가 알아서 다 할게라고 기어코 나를 가벼운 걸음걸이로 보내버리던 그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며 속이 상한다. 이후로도 텃밭에 쉬지도 않고 밭농사를 하고 오두막을 만들고 그네를 만들고 무리해서 자꾸 힘을 쓰며 일하는 모습들도.


그렇게 힘을 쓰며 만들어진 작은 공간이 아버지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그걸 내가 쉬엄쉬엄 해라고 하며 말릴 자격도 뭐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대부분 나의 얄팍한 편안함을 위해 써왔던 힘이었고, 겨우 이제 본인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쓰던 힘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소년을 찾기 위해 신이 나셔서 무리해서 했던 일들을 탓할 자격이 내게 있을 리가 없다.


돌고래를 보고, 가위바위보를 하고. 그런 일상들이 이어지겠지만 이제 나는 그런 순간순간들마다 내 슬픔을 되새김질하게 될 것이다. 6개월의 기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를 맞이해줄 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을 쉽사리 볼 자신이 없을 것 같다. 그러지 않겠다고 문자로 보내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우울한 날을 보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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