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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an 19. 2021

하늘을 좋아한다

[77~80일차]


하늘을 좋아한다.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래도 나는 각별히 하늘을 좋아한다.


가장 처음 좋아했던 하늘은 이 하늘이었다.


이 하늘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 하늘을 보자마자 그대로 홀리듯이 빠져버렸다.


이 하늘이 있는 세계에 들어서자 나는 지상에 붙박여 있었던 내 발이 두둥실 떠오르는 걸 느꼈다. 그 감각에 너무나 매료되어 나는 내가 떠나버린 지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한참을 떠다녔다. 무려 23년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덧 나는 지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법을 잊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게는 중력이 없었다. 그래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는 있었기 때문에, 마치 지상에 발을 딛고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겉모습을 어느정도 흉내낼 수는 있었다. 그냥 발을 지상에 닿게 하고 허우적거리면서, 걷는 것처럼 비행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비행'이나 '부유'였지, 결코 '걸음'은 아니었다. 남들이 터벅터벅 지상에 발을 딛고 무게감 있게 걸을 때, 나는 둥실둥실거리며 걸음도 비행도 아닌 무언가를 하고 다녔다. 그것은 차라리 헤엄에 가까웠다. 숨을 내쉬면 바닥으로, 숨을 들이쉬면 수면으로.


다음으로 좋아했던 하늘은 이 하늘이다.


이 하늘이라면 좀 더 익숙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이 하늘 아래서, 나는 많은 것들을 했다.


대부분은 세계를 파괴하려는 나쁜 녀석들과 싸웠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가슴 저린 이야기가 심금을 울렸고, 그들의 이름을 지금까지도 모두 기억한다. 그때에 귀를 스쳤던 멜로디를 다시 들으면 눈에 눈물이 어른거리는데, 그렇게 눈물 짓는 내가 이 하늘 아래의 나인지, 아니면 현실의 나인지 지금도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뭐 그렇다. 위의 하늘은 윈도우 95의 배경화면 하늘이고, 아래는 정말 오랜 기간 우리들의 컴퓨터 배경에 깔렸던 윈도우 XP의 그 하늘이다.


이 하늘들은 현실의 하늘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으로, 내 머리 위에 항상 떠 있었다. 나는 이 하늘 아래 우두커니 서서 홀린 듯한 표정으로 위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점과, 지금 현실(어느 것이 현실일까)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의 시점 중에서 어느 것이 내 인생에 더 비중 있게 감각된 시점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진심으로.





공사장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이곳 탑정에서, 나는 작업을 하지 않는 하루의 대부분을 하늘을 보는 데 쓴다.


내가 누리는 누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누구에게나 내세울만한 것이 하늘이다. 내가 누리는 하늘만큼은 따로 수식하고 꾸미지 않아도, 내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날마다 새롭고 복잡하고 예측불허한 환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


묘한 것은, 내가 하늘을 보며 느끼는 향수어린 감정이다.


나는 현실의 하늘을 보며, 이 하늘이 내 아주 오래된 원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을 느낀다. 내 기억속 어디엔가 존재하는, 한때 내가 올려다보았던 그 넓고 파란 하늘들을.


그 하늘은 내가 즐겼던 여러 '게임' 속의 하늘이다.


이렇게 멈춰진채로 그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하늘도 있었고,



이렇게 '쿼터뷰'로 내려다보는 시점의 게임에서도(이러한 시점에서는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머리 위에 있을 어떤 하늘을 상상하며 그 세계를 걸어다녔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 어느날 감상에 빠져 하늘을 한참 올려보면서 과거를 추억하다가, 내가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그 하늘이 현실이 아니라 이런 게임 속의 지나간 '가짜 하늘'들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미묘한 감정에 빠진다.


어째서 진짜 하늘을 흉내냈을 뿐인이 '미메시스'로서의 가짜 하늘들이, 내게는 원풍경이 되어 존재하고, 진짜 하늘이 미메시스가 되어 내 추억속의 가짜 하늘을 오히려 '재현'하고 있는가.


내가 기억하는 그 서늘하게 뺨에 닿던 바람의 냄새와, 눈부신 하늘과 하얀 구름들, 바람에 실려 미세하게 날리던 풀먼지 조각들의 감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가본 적 없는 세계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바닥을 구둣발로 밟을 때 울리던 그 선명한 발자국 소리. 존재하지 않는 바다의 짠 내음과 나무로 된 갑판을 지날 때 삐걱거리던, 물기로 가득한 그 바닥소리. 먹어본 적 없는 고기와 치즈덩어리의 맛.


그것들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일까. 나는 그것들을 '경험'하지 못했고 그냥 내가 느끼는 향수는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내 머리 위에 있던, 내가 그리워하는 그 하늘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현실에 발을 딛기 위해서 뛰어든, 내 딴에는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이 세계에서조차도, 나는 어느샌가 또다시 두둥실 떠올라있다. 기계소리와 용접의 쇠가 타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정신 없는 일정 속에서 차곡차곡 현실적인 '돈'을 벌면서도, 나는 일을 하는 내 몸과 그걸 지켜보는 내가 서서히 분리되는 것을 느낀다.


직업과 돈, 현실, 그런 무거운 것들이 또다시 나를 놓쳐버린다.


'몸'이 아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부유하고 있는 내 머리 위에는 지금 어떤 하늘이 있을까.








.....이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보조배터리 연결선이 부러져 핸드폰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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