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수아이 Jan 17. 2021

새해에는 100만원짜리 내기를

[76일차]


2021년 터키에서의 첫 아침은, 쌀쌀하다.


회사에서 나눠준 상하의 일체형 보온 작업복(우리는 이걸 '스즈키복'이라고 부른다, 모토사이클 레이싱복에서 유래했다는 모양)을 입은 뒤로 처음으로 추위를 느낀다. 여섯겹이나 상의를 껴 입어도 못 막던 추위를 단 한 벌로 막아주던 스즈키복이라, 어떤 추위가 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점점 내려가는 기온과 바람 앞에선 장사 없는 것 같다. 뭐 그래도 바람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 옷의 보온효과는 대단하긴 하다. 안에 옷을 조금 더 입으면 괜찮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도, 한 해의 마지막 날도, 첫 날도, 휴일은 없다. 휴일이란 오직 작업을 못 할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 때. 차나칼레의 다르다넬스 해협이 지독한 바람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게 위안이 될 뿐이다.



새해의 첫 날에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오늘은 특별한 날이 아니야'라는 것.


살다 보면 생일날은 묘하게 섭섭한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어떤 크리스마스에는 시금치와 밥만 먹어야 할 때도 있다. 특별'해야 하는' 날은 그 날이 특별하지 않은 데도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그렇게 발버둥치는 자신이 우스워 쉽게 우울해진다.


특별한 날이 아닐 거라고, 먼저 생각해버린 건 어쩌면 특별했으면, 그리고 우울하지 않았으면, 이라고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뭐 그런 것 때문에 아마도 나는 어머니(여전히 나는 '엄마'라고 부르지만)와 그런 내기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새해라고 어떻게 짬을 내서 전화를 했더니 '떡국은 먹었니?'라는 질문을 받는다. 물론, 아침에는 나오지 않았고, 점심도, 아마도 저녁도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시금치랑 밥을 먹어야 하는 이곳에서 무슨 그런 로망이 있겠나. 나는 오늘 여기서 떡국을 구경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한다. 이곳의 사정을 모르는 어머니는 그래도 새해인데 떡국은 나오지 않겠니, 라는 한가로운 말을 하신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 쉽게도, 떡국이 나오면 부모님께 100만원을 바로 보내드리겠다, 라고 호언장담을 해버린다. 그런 건 필요가 없다고 말하시지만 오히려 내가 나서서 단호하게. 여기는 그런 곳이에요. 크리스마스에는 시금치가 나오고, 새해에는 떡국이 나오지 않을 그런 곳.



탑정(탑 꼭대기)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떠오르는 해를 본다. 다른 누군가의 세계에서는 이미 중천에 떠있을 해가, 이곳에서는 이렇게 보인다. 새해 맞이 해돋이 같은 건 본 적도, 보고 싶었던 적도 없었는데 이걸 이렇게 보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항상 아침 11시에 일어나던 내가 이렇게 태양보다 부지런하게 먼저 출근하는 삶을 잘 살아갈 줄은 몰랐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는 삶은 뭐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결코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잠을 일찍 자서 그런지 거의 아무런 저항감 없이 벌떡 깨서, 금방 준비해서, 설렁설렁 출근을 해버린다.


아침형 인간이라니, 내가?


퇴근 후의 삶, 여가, 이런 걸 모조리 포기해버리고 마음을 비워서 그런 걸까. 퇴근을 하고 격리된 숙소에서 한 시간 남짓한 자유시간을 불안하게 소비하느니, 그냥 맘 편하게 출근을 해서 주어지는 대기시간에 멍하니 쉬는게 낫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내 몸의 생활 주기는 그대론데, 여섯 시간 늦은 터키의 시간대에 내 몸이 꼭 맞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아침 11시에 일어나는 나는, 이곳에서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날 테니까.


그러면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그냥 터키형 인간인 것이다. 메르하바.


유난히 맑은 하늘과 몽실몽실 떠가는 구름을 보며, 나는 가끔 한낮에 종종 생기는 그늘이 '구름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구름의 그림자.


너무나 당연한 건데도, 이 말이 너무나 생경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미시적인 스케일의 세계에 발붙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름도 물체고, 햇빛을 등지면 자신의 그림자를 지상에 드리우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것이 불 꺼진 가로등의 그림자나, 내 그림자(사실 스스로의 그림자를 의식하며 본 것이 얼마만인지) 같은 평범한 그림자와는 다르게, 어떤 기상효과처럼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구름도 그림자가 있다. 지구가 그림자가 있듯이.


체감하는 스케일이 높은 건물과 비행기 사이의 어딘가에서 멈춘 이곳 탑정에서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곳의 독특한 포지션 때문일 것이다. '지구'라는 것이 언뜻 보일락 말락 할 것만 같은 이 높이. 300미터.



뭐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은 하루가 간다.


탑정의 상징과도 같았던, 부산 상남자 스타일이면서도 묘하게 다정하게 챙겨주는 면이 있던 J반장님이 한달 휴가를 가시고, 작업이 끝났다는 걸 알려주지 않아 엘리베이터를 못타고, 그로 인해 배를 못 타고, 추가로 낙오자들을 태우러 온 배도 다른 반장님들끼리 훌쩍 타고 떠나버리고.


그렇게 새해부터 야근 후 세 번 낙오된 나는 깜깜한 부둣가에 가만히 앉아서 낙오의 낙오자들을 태우러 올 배를 기다리며, 이것이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2021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새해의 첫날이라니 무슨. 그냥 지구가 돌고 있을 뿐인데. 데굴데굴 하고.


잊을 뻔 했지만 기가막히게도 회사는 내 기대를 배신(?)했고, 나는 내기에 졌다.


탑 꼭대기까지 따뜻하게 배달된 떡국을 보며, 나는 토스로 부모님께 100만원을 송금했다. 떡국은 그냥 그랬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서 상당히 맛있는 축에 속하는 거였고, 다른 반찬들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따뜻했다는 것이 좋았다. 덕분에 떡은 퍼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코로나로 봉쇄된 이후 오랜 보릿고개 끝에 특식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 내기는 그냥 핑계였을 뿐이다. 그냥 나도 용돈이라는 걸 좀 돌려드리고 싶었다. 최대한 방탕하게 쓰세요, 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그것조차 소비를 특정하게 제한하게 될 것 같아서 그냥 보내드렸다. 알아서 뭔가를 하시겠지.


내 건전한 생애 가장 큰 배팅에서 패배하는 것으로 2021년은 시작된다.


떡국을 먹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한 살 더 먹어버렸네.


이번에 먹게 된 나이는, 다른 때와는 달리 좀 부담스럽긴 하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6시간 후의 세계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