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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an 12. 2021

6시간 후의 세계에게

[75일차]


해가 넘어갈 때 종종 몇몇 사람들과 안부를 나눈다.


보통은 부모님, 가끔은 친척동생들이나 친구들, 선배와 후배들, 때로는 여러 분야의 내 선생님들. 먼저 연락하는 법 없이 점점 더 작은 큐브형 방 안으로 침전하는 무심한 내게 굳이 연락을 걸어와 주는 고마운 사람들.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나라는 사람일텐데도, 이제는 함께 했던 시간들이 모두 지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식도 없이 살아가는, 그냥 조용한 어떤 한 사람이었을 텐데도, 그런 나를 어느날 떠올려서 잘 지내냐, 하고 무심코 걸어주는 그 말들이 의미있게 감사하다.


올해도 그런 연락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해가 이미 넘어가버렸다. 자취방의 불을 끄면서 2020년은, 그 해의 3월부터 이미 예감했지만 정말로 다른 해와는 달리 특별하고 다사다난한 년도였다, 라고 혼자 생각한다.


살고 있는 곳이 신촌의 언덕 위 자취방이라 그런지, 바깥에서는 여전히 떠들썩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2020년의 마지막 식사로는 혼자서 텐동을 먹었다. 그렇게 맛이 뛰어난 집은 아니었지만 가까워 즐겨 찾는 곳이었고, 어째서인지 사람 많은 신촌에서도 그 시각의 그 곳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인파에 지쳐 조용한 곳을 찾아 들어온 커플 한 쌍과 구석에서 밥을 먹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2021년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2010년 이후로는 해를 가리키는 숫자가 마치 잊고 지냈던 내 나이처럼 그다지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몇몇 고전 SF영화나 만화를 보다가 그들이 설정한 그 미래의 시대들조차 년도로 따지면 이제 지나쳐버린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뿐이다. 그들이 상상한 것들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자동차가 공중에 떠다니지도, 사람들을 헬멧을 쓰거나 산소수트를 입고 다니지도 않지만, AI가 마침내 바둑으로 사람을 이겼고 사람들은 손에 들어오는 작은 기계 하나로 모든 것을 다 하고 다닌다. 핵 전쟁이 일어나거나 운석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떤 전염병으로 인해 우리의 세계는 눈에 보이도록 뭔가가 달라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나는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올해도 멈춰진 소설은 쓰지 못했다. 그 사이 또 다른 사람들이 결혼을 했다. 서울은 여전히 몸서리쳐질 정도로 춥고, 나는 같은 음식들을 로테이션을 돌려가며 먹고 산다. 한솥 도시락에서는 내가 좋아하던 메뉴가 사라졌고, 편의점 삼각김밥들은 망할 마요네즈(난 이걸 못 먹는다)가 들어간 메뉴만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무데나 치즈를 넣던 유행처럼, 아무데나 마요네즈를 주입하고 있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집 바로 앞의 불꺼진 작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좀 탔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난 다음 그네를 타면 정신이 시원해진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힘껏 몸으로 반동을 주면 한겨울 서울의 차가운 바람이 발가락 사이로 들어와 젖은 발을 말린다(얼린다). 추워서 오래는 못 타지만 그 서늘한 감각이 몹시도 좋다. 이곳에서 얻은 몇 안 되는 즐거움이다.


2020년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도, 2020년에 했던 가장 훌륭한 선택은 연초에 이케아에서 매트리스를 산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하루를 보냈더라도, 잠들기 전 이 푹신한 매트리스에 누우면 모든 것이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돈을 벌지 못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더라도, 작은 방에서 여전히 그냥 혼자서 살아가고 있더라도.


그러다가 문득, 추석 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터키에 일하러 가볼래?'


터키에 다리 공사를 하러. 근처 동네에서 간단한 알바나 과외를 해본 적도 없는 내가 터키에 다리 공사를 하러 간다고? 


당연히 실감이 나지 않아 거절했던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지금 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노트북을 열어 검색을 해보니 터키는 한국보다 6시간이 늦다. 그곳의 사람들은 아직도 2020년을 살고 있을 것이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잠들기 전 터키에서 일하는 내 삶을 한번 상상해본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공사판이라고 했으니 뭐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살고 있겠지. 이제 3개월 쯤 됐을 테니 '실전압축근육'인가 뭔가 하는 게 좀 생겨 있지는 않을까. 살은 좀 빠졌을라나. 팔다리는 멀쩡할까. 손가락은 열 개 다 달려 있겠지 그래도. 아마 지금쯤이면 퇴근하고 어디 들러 케밥이라도 먹으면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알게 된 사람들하고 송년회 파티나 조촐하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케밥은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네. 생각난 김에 내일은 혼자 이태원 가서 터키 음식이라도 먹어 볼까.


지나고 나면 결국 추억이 될 텐데, 시작을 하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내 인생에서 여태껏 수많은 도전과 경험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고요하고 재미 없는 삶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를 아무리 작은 방에 가둬도 멀쩡하고 건전한 정신은 재미 없는 이야기만 질긴 껌처럼 질겅질겅 머릿 속에서 씹고 있을 뿐인데.


이번에도 나는 하나의 기회를 그냥 지나쳐 보냈고, 여느때와 같은 하루하루가 그저 쌓여만 간다. 그렇게 쌓이던 나날이 연못의 시시오도시처럼 가득차서 통, 하고 잠깐 소리를 내며 한 해가 또 한 번 지나갈 뿐이다.


몸과 생각을 녹이는 푹신한 매트리스에 누워 다시 한 번 여섯 시간 후, 그곳에 있을 수도 있었을 나를 상상해본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옆에는 누가 있을까.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일 하느라 바쁜 와중에 무슨 글이라도 끄적거리고 있을까. 터키의 하늘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있을까. 얼굴에 닿는 바람은 이곳의 바람처럼 차가울까. 이곳의 시간보다 여섯 시간 느리게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나'는 지금 이곳의 나보다 좀 더 어른스러워지긴 했을까. 그 '나'는 지금 이곳의 나를, 나와 마찬가지로 상상속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어떤 세계의 나는 잠들었을 지도 모른다.



저녁 6시. 2020년의 태양은 이제 막 바다 너머로 사라지고 있다. 간만의 어색한 정시퇴근, 조금씩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주탑 부둣가 계단에서 사람들과 함께 퇴근 배를 기다린다.


반장님들은 저마다 핸드폰으로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2021년 카운트 다운 방송을 보고 있다. 이미 컴컴해진 그곳에서는 코로나 때문인지 예전처럼 사람들이 몰려 떠들썩하게 행사를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유난히 활기차게 느껴지는 진행자의 들뜬 목소리가, 사람 없이 불빛만 가득한 서울의 풍경만 보여주는 영상과 겹치며 묘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반장님들은 먼 곳의 거리만큼이나 먼 곳의 시간 너머로 가족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며 웃고 떠든다. '야 저쪽은 이제 2021년이겠다.' 


배를 기다리느라 무료한 터키 인부들이 식사 후 남은 빵을 수제비처럼 아무렇게나 뜯어 바다에 날리면 갈매기들이 소리를 내며 날아와 받아먹는다. 출렁거리며 주탑 기둥에 부딪히는 바다에는 해파리들이 연등처럼 둥둥 떠 있다. 얼굴에는 강하긴 하지만 끝이 뭉툭한 바람이 와 닿는다. 바람의 냄새는 매일매일 낯설다. 주위에는 현란한 형광색 빛깔의 구명조끼와 작업복이, 저마다의 역할에 따라 알록달록한 헬멧들이 계단을 따라 죽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 벽화에나 나올 것 같은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터키의 하늘.


이번에는 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고, 그 덕분에 지금의 나는 이런 세계에서 새해를 기다리고 있다.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2020년인 이 세계에서 적어도 여섯 시간의 젊음을 더 번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폭죽 대신 퇴근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들리고, 나는 도착한 배에 훌쩍 뛰어 올라타며, 어딘가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어떤 '나'를 문득 떠올린다. 조용한 방에서, 매트리스 위에서 이제 막 혼자 잠이 들었을. 


지금 이곳에 있는 나보다 훨씬 현실성 있는 '나'지만, 어쨌든 현실을 획득한 것은 지금 이곳의 나다.



작업복을 입고, 헬멧을 쓰고, 목장갑을 끼고, 무전기를 메고, 구명조끼를 들고.


어린 나이에도 수염이 성성한 터키 친구들과 함께,


매연 냄새가 지독한 배 위로,


해파리와 갈매기가 가득한 바다를 넘어 훌쩍.



작은 방에서 머지 않아 조용한 아침을 맞이할 너에게는


조금 뜨거운 안녕을 보낸다.


Güle Gü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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