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4일차]
바람이 불어 작업이 없던 어느 날.
탑 꼭대기에서 알바생들끼리 수다나 떨면서 오늘은 마음 편하게 하루종일 대기만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는데, 무전으로 나만 탑 하부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무슨일인가 싶어서 내려갔더니 갈 데가 있어서 배를 한 척 불러 줄테니 구명조끼를 챙기란다. 구명조끼를 챙기고 탑의 남쪽 선착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더니 40분 만에 작고 노란 배가 한척 통통거리며 도착한다.
나를 납치해가기 위해 온 통통배... 치고는 굉장히 세련된 내부 인테리어다. 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적하다. 덕분에 뭔가 좋은데로 가는 건가 싶어서 괜히 기대감이 생긴다.
배-> 승용차를 타고 또 어디론가 멀리멀리 간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콧바람을 쐬며 마음의 고향 랍세키를 지나친다.
들어가자마자 싸구려 여인숙 같은 느낌으로 열악했던 랍세키의 일디즈 호텔도 지금은 벌써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적당한 속도로 추억이 깃든 가게들을 지나가며 기억을 하나하나 되새김질 해본다.
좁은 방을 나와 뽈뽈거리며 바깥을 돌아다니던 기억. 핸드폰 가게에서 유심칩을 샀던 기억. 가까운 곳에서 바클라바(시럽에 젖은 반지함 크기의 파이)와 차이를 사먹으며 피로를 풀던 기억. 그리고 숙소에서 가깝던 소주올루(?) 마트.
이 마트에 대해서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알바생 중 한 명인 J가 물건을 사러 갔다가 카운터를 보는 여자 알바생에게 반한 것. 그래서 틈만 나면 온갖 물건들을 사러 매일같이 마트를 들르다가(그러면서 차마 말 한마디 못걸었다더라), 어느날 문득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혼자 마트를 찾아갔었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한국인들 중에 그런 식으로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했다니, 경찰이 출동했다니 그런 떠다니는 소문들을 이야기하며, 갑자기 급하게 지나가는 구급차를 보며 혹시 J가 거절당한 충격에 차도로 뛰어든 것은 아닌가 하며 농담을 하고 있을 무렵, J가 의미모를 표정을 하고는 어딘가에 전화를 하면서 무사히(?) 돌아온 것이 아닌가. 뜸을 들일 줄 아는 J는 알바생들의(그래봤자 어릴 적부터 친구라는 U와 Y, 그리고 나 하나 뿐이지만)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풀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손님들이 많아서 J는 말을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하고 계산만 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손님들에게 떠밀려 나와버렸다. 그래서 바깥에서 기웃기웃거리다가 그냥 날이 아닌가보다, 하고 포기를 하고 나오다가 우리들의 열화와 같은 핀잔에 다시 한번 도전하러 마트에 뛰어들었던 차였다.
애꿎은 물건만 더 사고 계산하던 중에, 계산이 끝난 핸드크림을 선물로 주며 구글 번역으로 손이 트지 않게 잘 쓰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혹시 친구로 지낼 수 있냐고 하며 번호를 달라고 했는데, 점장의 눈치를 보던 마트 알바생은 결국 번호를 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작된 랍세키의 핑크빛 기류는 조금씩 무르익기 시작했다. 어느날 함께 마트에 들러 계산을 하던 차에, J가 계산을 끝내자 마치 J에게 보라는 듯이 재빨리(이어지는 계산 사이에 빠르게 보여주기 위해 조금 급하고 서툰 손놀림으로) 그 핸드크림을 꺼내 손에 바르고는 차마 얼굴은 못 마주치고 혼자 계산대를 보고 피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J 다음이 내 계산 차례라 나 역시 볼 수 있었다), J는 마트 입구를 나와 설레하며 방방 뛰었다.
그러나 이러한 풋풋한 스토리도 안타깝게도 현장 봉쇄와 함께 위기를 맞았다. 숙소를 차나칼레의 격리 호텔로 이동하고, 외출 금지령이 내려 현장과 숙소만 오갈 수 있는 상황에서 이제 직접 만나기가 불가능해진 것. J는 이제 막 시작된 가슴 두근거리는 썸이 시작과 함께 차단되어 버린 것에 좌절했지만, 최근에 들은 근황에 의하면 그래도 문자 대화로 연락을 계속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며 도착한 곳은 공사현장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현장인 야적장의 바지선. 이곳은 피셔링 하버라고 하는데, 이곳에 공사 현장에 배달되어오는 온갖 자재들이 보관되어 있다.
바지선은 평평하고 네모난, 이게 배인가 싶을 정도로 특이하게 생긴 배다. 야적장의 한곳에 정박해서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냥 도크인가 싶어서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배 위에 올라 있다.
이곳에서 나는 특별히 나만 지목해서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초반에 알바생들이 각자 위치에 배정될 때 나는 파워드 언릴러라는 조금 특이한 기계에 배치되었다. 조작법이 다른 기계에 비해 조금 복잡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 그녀석과 한달 정도를 함께 지냈다. 그 기계로 하는 업무가 끝나고 언릴러는 어디론가 실려가버려서 작별을 고했나 싶었는데, 그녀석이 여기에 있었고 이 기계를 돌릴 알바생이 잠깐 필요해서(어쨌든 지금 현재는 알바생들 중에 유일하게 내가 다룰 수 있는 상태다) 나를 부른 것이다.
뭐 별 이유없이 뿌듯한 느낌도 들지만, 사실 같은 월급을 받고 일하는 와중에 하나의 일이 더 생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손해나 마찬가지다.
덕분에 나는 바람이 불어 작업이 없는 날, 쉬지도 못하고 바람과 관계없이 하루종일 언릴러를 구동하게 되어 버렸다. 언제까지 돌려야하나 물어보니 야간조와 교대를 할 때까지 연장근무란다. ㅎㅎㅎ.
고급스런 통통배를 탈때부터 괜히 기대를 했는데, 어림 없지. 결국 주어진 것은 때 아닌 야근일 뿐. 오늘도 덕분에 야근수당을 꽉꽉 채운다. 그래 돈이나 벌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