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6일차]
다르다넬스 해협의 선물과 같은 바람이 불고 덕분에 달콤한 휴식을 조금 취한 나는 조금 새로운 소식을 듣는다.
오늘부터 지상으로 출근하라고.
오랜 시간 이루어졌던 캣워크 플로어(메인 케이블 설치를 위한 가교) 공사가 마침내 끝나고 이제 아시아 사이드와 유럽 사이드는 기나긴 간이 구름다리로 길게 이어졌다. 원래는 현수교의 줄이 있어야할 그 자리에 건설된 임시 다리로 인해, 마음만 먹는다면 해협 반대편으로 '걸어서'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이제 공정이 바뀌어서 우리 윈치수(줄을 감고 푸는 윈치 기계를 다루는 직책) 알바생들도 그에 따라 근무시간과 근무지 조절이 있었다.
아시아 쪽의 앵커리지(사진 가장 왼쪽 끝의 뭍 지역)에서도 주야간 조가 동시에 돌아가면서, 주간2명 야간 2명씩 돌리기 위해 윈치수 한 사람이 필요하게 된 것(아시아 앵커리지의 윈치수는 그동안 3명이었다).
'알바생들'의 근무지 조절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콕 찝어 말하면 나 하나였다. 그 빈자리를 내가 메꿔야하는 것. 내 출근지는 이제 아시아 주탑 하부-> 아시아 주탑 상부(탑정)-> 피셔링하버의 바지선-> 아시아 탑정을 거쳐 마침내 공사현장 견학 때 가장 처음 보았던 아시아 앵커리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출근길에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안전벨트를 더 이상 차지 않아도 된다는 것(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300m 공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게 되었다는 것. 탑정의 바람을 맞지 않게 되었다는 것. 야근 후 퇴근길의 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주탑의 끔찍한 화장실들과 작별하게 되었다는 것. 굴뚝의 용접 매연을 더 이상 맡지 않아도 된다는 것. 추락물에 대한 걱정으로 '쿵'하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하늘 위를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과연 이것은 반가운 일일까.
나는 탑정과 작별하며 어딘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그것은 내가 처음 탑에 올라올 때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모순되는 감정이었다. 그때는 탑 꼭대기에서 내려갈 수 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누군가 난간 너머로 손을 내밀고 담배를 피우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었는데. 더 이상 탑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내 머릿속에는 주탑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넓은 바다와 넓은 하늘, 반쯤 우주와 같은 시점. 하루하루 새로운 구름과 노을. 차가운 바람을 피하던 (플라시보 효과로만)아늑한 자리. 생명 같은 히터가 있던 간이휴게실. 갈매기들. 식사때마다 밥을 꼭 2인분씩 무척이나 맛있게 먹던, 힘 세고 해맑은 터키인 친구. 경치만은 끝내주던 탑정의 화장실(그걸 화장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제 막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기 시작하던 반장님들.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알바생 U와 Y.
하부에서 탑정으로 근무지를 바꾸고 이제 슬슬 이 공간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더니, 나는 또다시 공들여 익숙해진 이 공간을 떠나야 한다.
어쩌다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 신세가 되었을까. 왜 하필 내가 그 빈자리를 메꾸러 가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언젠가 어떻게 대화를 하다 보니 팀장인 K반장님을 통해서 알게 된다.
드라이브 윈치(아시아 사이드에서 유럽 사이드까지 길게 연결된 줄을 움직이는 기계)를 다루게 될 인원을 주탑에서 한 명 데리고 와야하는데, 이전에 파워드 언릴러(주탑 하부에서 내가 처음 배정받았던 줄을 푸는 기계)를 해본 경험이 있는 나를 선택했다는 것.
'파워드 언릴러랑 드라이브 윈치랑 똑같잖아. 기왕이면 바로 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와야지.'
'팀장님, 언릴러랑 드라이브 윈치랑 완전히 다른데요.'
'잉? 똑같은 거 아니었어?'
'다릅니다, 달라요...'
이렇게 우연찮은 오해(?)로 인해 나는 갑자기 팔자에도 없던 드라이브 윈치라는 기계를 또 새롭게 처음부터 배우게 된다. 가장 처음 주탑으로 출근할 때 하부에 남을 알바생 한 사람(뭔가 복잡한 기계가 있다고 해서 조금 꺼려지던)을 뽑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가 혼자 졌던 그 스노우볼이 여기까지 굴러오네. 그때 가위바위보에 이겼다면 나는 떠나는 그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출근 배를 타고 있었겠지.
어찌됐든, 터키 다리 공사 단기 계약 알바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나는 아시아 앵커리지의 일원이 되었다.
탑정과 앵커리지, 어느 곳이 더 낫냐고 물어본다면, 그게 어디든 그냥 '원래 있던 곳'이 낫다는 말을 하고 싶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것은 아무래도 스트레스다. 탑정에서는 왠만하면 윈치수는 윈치수의 일만 시킨다, 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던 반면에, 이곳에서는 윈치 작업이 없는 날이면 나도 그저 한명의 노가더일 뿐이다. 이제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면 이리저리 메뉴를 조작해가면서 궁금해하는 반장님들께도 이건 뭐다 이건 뭐다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는데, 'OOO 조이게 SSS에 가서 XXX랑 ZZZ하나씩 들고와' 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냥 '내가 어디서부터 모른다고 말할 지'를 고민하며 어리둥절하게 서 있을 뿐인 어리버리 멍청이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신입 알바생이 된 기분으로, 원래부터 앵커리지에 배정을 받아 근무를 하고 있던 G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곳의 생활에 천천히 적응해나간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돌아온(?) 앵커리지에서 내가 유일하게 기대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동굴'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기가 막힌 음향효과로 휘파람 소리조차 천상에서 내려오는 멜로디로 바꿔주던 그 기둥 안 동굴에서 연주하기 위해 차나칼레 악기상에서 악기를 샀던게 벌써 한 달 전인가 두 달 전인가. 그때는 이렇게 긴 기간동안 앵커리지로 갈 일이 없을 줄은 몰랐지.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올 줄 알았던 이날을 위해, 고이 간직해뒀던 악기를 분해해 주머니에 몰래 넣어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동굴. 이제는 휘파람이 아니라(오래 불면 입이 아프다) 악기를 불어야 할 때. 휘파람이 그정도면 이 악기는 도대체 어떤 소리를 낼까.
나에게 음악이란 취미를 가지게 해준, 나의 해리포터 지팡이, 아마 당신도 한번 쯤 연주해본 적 있었을 법한 악기,
그 악기는...
다음 회에 공개됩니다.
라며 뜸들일 필요는 없으니 바로 밝힌다.
바로 리코더다.
약 5000원 짜리 야마하 리코더.
바로크 스타일은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저먼 스타일을 샀다.
사실 스스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나는 리코더를 좀 분다. 리코더치고는.
그리고 조금 걱정하기도 했던(그냥 리코더 소리 나면 어떡하지) 이 동굴의 울림은, 딱 기대 만큼 끝내줬다.
그저 혼자 듣기가, 그리고 공사가 끝나면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아까울 뿐.
아주 먼 훗날에, 나는 세상에 다시는 가져볼 수 없을 이 무대를 반드시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 그리워할 나의 몫까지, 앵커리지에서 힘껏 불어야지.
차나칼레 대교의 공사현장 어딘가의 어둡고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