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nd HER'
시리
시리의 목소리는 왜 여자일까?
<Her>('그녀'라고 하기엔 뭔가 어색한 느낌)를 보면서 문득 들었던 의문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영화와는 별개로 그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답은 간단했다. 남자가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간단한 답에는 수많은 또 다른 의문들이 따른다. 휴대폰의 사용자는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국가에서는 시리의 기본 음성이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목소리를 어느 한쪽으로 '일단' 선택한 그 (불순한)목적은 무엇인가? 이것 또한 '평등'이라는 문제와 관련되는 것일까? 이런 바깥 세상의 문제들은 일단은 제쳐두도록 하자.
<Her>는 왜 her일까. 역시 간단한 답이 있다. 테오도르는 남자니까. 인공지능이 'She'가 된 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시리의 문제와는 달리, 여기에는 별다른 의문이 들지 않는다. 왜. 이것은 테오도르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렇다. 이것은 '남성 판타지'에 관한 영화이다. '남성 판타지'라는 말이 마치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린다면,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 단어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남성 판타지'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 영화가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화'라는 단어가 또 거슬린다면, 역시 이번만큼은 이 단어를 조금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은 언제나 한 개인에게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이 영화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고, 또 굉장히 진지하다. '대상'이란, 개인이 평생을 지니고 다니며 풀어야할 숙제 같은 것이다.
1인칭
테오도르가 자신의 집에서 혼자 게임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울린다'. 그는 세계에 '혼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1인칭이라고 말해보자. 1인칭의 세계에서 '관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와 똑같은 상대를 실감하며, 상대와 나를 어떤 동일한 선상에 놓고, 그로 인한 서로의 존재감의 무게를 음미하는 그런 일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일단 상대와 나는 모습부터 다르다. '생김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내 눈앞에 있는 상대방은 일단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습이 보인다. '나'는? 거울이라도 보지 않는 한 내 얼굴과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세계가 반응하는 (내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따듯한 눈길로, 혹은 한심한 눈길로 바라본다든지)양상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의 위치와 존재감을 추측할 뿐이다. 반면 상대방은 (적어도 내 눈에는) 온전한 육체를 가지고, 활발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앞에서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오로지 시선 뿐인 나와는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대상이 아닌 대등한 관계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다. 나와 상대를 같은 존재로 취급해서 엮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우리 둘을 지켜보는 제 3자의 시선 뿐이다(테오도르도 종종 이러한 제 3자의 시선으로 다른 커플들을 바라보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의 방식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단지 마음 씀씀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관련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대하고, 스스로 멀어지고, 마침내 그들과 이별하는 것은, 그가 그러한 시점의 문제와, 계속 끓어오르는 사랑과 공허함에 대한 문제를 쉽게 연결해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인공지능 '사만다'는 특별한 존재다. 그녀 역시 테오도르에겐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존재방식에는 테오도르와 공유하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타인이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장점이다. 그녀 역시 시선은 있되 모습을 가지지는 못한 '1인칭'의 존재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인칭의 세계에서, 세계의 모습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으로 인식하듯이, 마찬가지로 그녀 사만다의 존재를 테오도르는 상상으로 인해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와 무척이나 닮았고, 그가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쉽게 그의 일부분이 될 수 있었고, 또한 그가 사랑을 할 수가 있었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인공지능의 이야기는 그 인공지능이 마침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심하며 생기는 딜레마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인공지능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물론 <Her>에도 그런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은 인공지능의 인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계하는 테오도르의 1인칭 세계를 뒤흔드는 데 목적이 있다. 굉장히 리얼하며 자연스러운 상상과 장치들이 테오도르의 세계를 사정없이 흔든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느꼈다가, 느끼지 않았다가하며 흠뻑 기뻐하고, 괴로워한다. 그녀의 존재가, 그와 일부가 되었다가, 대상이 되었다가 하기 때문이다. 모습을 가지지 않은 그녀는 귀를 통해 그의 머릿속에서 직접 말한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 스스로에게 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소통하는 대상. 테오도르가 여태껏 겪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랑에 빠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웃음
영화를 보면서 나는 곳곳에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영화에서 드문드문 발휘되는 유머감각 덕분에 그렇기도 했지만, 영화가 정말 개인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경험들(과거 블로그에 올렸던, 혹은 소설에 썼던)을 거의 그대로 영상화하고 있지 않은가. 평상복으로 지하철을 타고 바다에 가고, 해수욕 차림을 한 사람들 사이에 평상복을 입고 그대로 섞이고. 그 분리된 감각을 한껏 느끼고. 큰 사건 없이 대화와 분위기만으로도 흠뻑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도 몰랐다. 항상 '공감'을 작품 감상에서 중요한 요소로 취급하지 않았던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곳곳에서, 나는 지금 내가 세계를 생활하고 있는 방식을 마주했다. 그런 우연적인 요소들이, 이 영화를 내게 손꼽을 만큼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만들었다. 여운이 굉장히 깊었고, 나는 눈을 감는게 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감은 채, 한참을 크레딧 음악을 들으며 누워있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