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포트폴리오
<계단 위의 여자>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시선을 상상했다.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처럼, 하나의 대상으로서 여자를 바라보는 어떤 남자. '계단 위의'라는 수식어는 '여자' 앞에 붙어 그 여자의 위치와 문맥을 특정하게 지정한다. 여자는 계단 위에 있어야 한다. 그 남자가 보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소설은 <계단 위의 여자>라는 동명의 회화 작품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체의 여자가 계단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 작품을 소개하며, 이 소설은 그 대상화의 시선이 어떤 은유나 암시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선언한다. 정말로 대상이라는 것. 물감이 굳어 캔버스에 그려져 있는 그 물질적인 작품이 아니라, 작품 속에 존재하는, 특정한 인물로서의 그녀가.
1부
제목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걱정과는 달리, 1부는 그런 대상화의 시선을 비웃는 이레네의 통쾌한 복수로 끝난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성욕과 뮤즈의 대상으로 여기는 두 남자와 더불어, 자신만은 뭔가 그들과 다르다고 여기는 주인공과의 약속까지도 깨부수며, 이레네는 액자 속 계단 위에서 탈출해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러기까지 그림을 둘러싼 인물들의 갈등과 그 진행 과정도 재미있었고, 나름대로 흘러가는 긴박감도 좋았다. 그림 속에서 탈출한 그녀는, 자신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런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들게 만드는 챕터였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자신을 관람하던 남자들을 관람하는 이레네의 소설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행되는 것은..
2부
그리하여 진행되는 것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주인공이자 변호사인 한 남자의 시점의 이야기다. '동의하지 않는 사이에', 작품은 금방 40년이란 세월을 흘려버린다. 마침내, 라고 하기에는 아직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숙성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그녀가 숨어서 지내고 있는 작은 만을 찾아낸다. 물론 주인공은 과거에 자신을 배신한 그녀에게 분노를 하고 다그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쿨한 태도로 그녀의 곁에서 묘한 시간을 보내고, 뭔가 개연성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직접 알리는 것도 아니고 숨겨왔던 그 그림을 전시하여 간접적으로 초대했던 과거의 두 남자, 군트라흐와 슈빈트 역시 그 만에 도착한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세 남자와 이레네. 굉장한 일이 벌어질 법도 하건만, 이 소설에서 서사적으로 가장 소용돌이쳐야 할 이 2부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일은, 안타깝게도 1부의 관점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아니 어쩌면 더 볼품없는 서사다. 긴 시간을 보내고 찾아온 두 남자는 예전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과는 무언가 좀 다르다, 라고 생각하는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기껏 찾아온 그들은 누구와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를, 자신의 근황 이야기나 사유만 잔뜩 들어놓다가, 별일 없이 주인공과 이레네를 남겨두고 휙 사라져버린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별다른 변화 없는 세 남자가 아니라, 사실은 그것 외에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이레네가 굳이 그들을 그런 식으로 초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난 당신들을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그들이 여전히 눈앞의 대상이 아닌 자신들의 삶에만 충실하다는 걸 재확인하고 싶어서? 아니면 죽기 전에 별 가치 없을 그들의 얼굴을 다시 확인해 보고 싶어서? 정말로 이레네라는 캐릭터에게 그러한 욕망이 있었을까? 눈앞에 보이는 그 유치한 남자들의 난장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어떤 장면을 기대했을까? 무엇을?
못 말리는 두 남자와, 못 말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두 사람과는 뭔가가 다른(너희들이 시답잖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이레네의 건강을 살피는 눈을 가졌지) '특별한' 남자가, 그들을 어머니처럼 감싸 안는 여자 앞에 모여서 열심히 대화를 하는 그 구도는 정말 매력이 없었다.
대화의 내용은 더욱 그랬다. 주인공의 사유와 군트라흐와 슈빈트의 대화. 그것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40년 전에 그들의 곁을 떠났던 한 여자와 그 이후의 시간, 혹은 그 이전의 시간에 관한 것인가.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였고, 혹은 어떤 의미도 아니었는지. 그리하여 지금 눈앞에 만난 그녀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지.
그러나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뜬금없이 등장하는 온갖 사회적 이슈들이다. 페미니즘(그것은 이 소설의 밖에서, 독자들이 이 소설에 대해 생각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사유일 수는 있다, 이렇게 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의 어떤 알리바이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이니, 고령화 사회니, 동서독 통일이니, 무슬림이니, 자본주의니. 주인공은 도대체 왜 고등학교 논술 시험에서나 나올 법한 주제들을, 기껏 찾아온 그녀의 집에서 머릿속으로 지껄이고 있는 걸까. 그런 것들을 맥락없이 마구잡이로 페이지에 쑤셔 넣어 배경에 깔아놓으면, 이 소설은 사회적으로 무게감 있고 메시지를 담은 의미 있는 소설이 되는 걸까. 이것은 결국 이레네와 남자들 사이의 이야기인데. 2부의 정적인 서사 동선을 가리기 위할 살을 찌우기 위해, 뭔가 무게가 있을 법한 사유들을 아무렇게나 콜라주한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었다.
냅다 던져놓은 1부의 이레네의 행동의 동기를 마련하기 위해, 한발 늦게 그녀에게 열심히 부여하고 있는 뜬금없는 자연주의 이론들은 어떤가. 그것은 정말 1부에 생성된 이레네라는 인물에게 연결될 수 있는 속성인가. 그녀는 언제부터 문명을 싫어했고, 이념을 위해 싸우는 투사였는가.
나는 2부의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에서, 오래전의 신문지를 아무렇게나 몇 장 꺼내 들고, 그 신문기사들의 사회적 이슈에 대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자문자답하며 논평하는 작가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추임새를 넣어주는 청자 캐릭터를 앞에 앉혀 놓고(그녀는 그런 식으로 소비될 캐릭터가 아니었는데도), 작가 자신의 사상을 대변하는 캐릭터의 입을 통해 열변을 토하는 그 구성은, 정말 소설로서는 매력적이지 않은 방법이었다.
3부
'못난 두 남자'가 떠나버린 작은 만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레네의 췌장암 고백과 함께, 그리고 그녀의 배설물을 치워주는 사건을 계기로 둘의 관계는 지금까지의 서사 중에서 가장 가깝게 진행된다(왜 주인공은 이런 식으로만 그녀에게 어필될 수 있었을까).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이, 이제는 소설의 주 정서는 반문명주의가 되어 있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그 정서는 누구의 것일까. 소설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쟁과 사랑을 겪었'다고 하는' 이레네의 것인가. 아니면 만나본 적 없는 작가와 유난히 닮은 사유를 가진 것 같다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주인공의 것인가.
문명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예민하게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주인공의 시선이 머무는 대자연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 묘사에서는 아무런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성공한 변호사로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아온 한 남자가 가진 인생과 문명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은,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지 않고 그저 주인공의 입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방식은, 공감하기엔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이레네와 함께 반문명적인 일과를 보내고, 그녀와 함께 발코니에 앉아서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애초에 원래의 이레네라면 어떤 호기심의 씨앗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이야기)를 하고, 그녀는 귀를 기울이는 그런 장면들. 그저 어떤 '긍정적인 그윽함'을 연출하는 것이지만 너무 막연했고 매력이 없었다.
이 소설이 문명과 반문명의 문제였다면, 그것은 주인공 자신의 두 가지 모습과의 싸움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소설 내내 그런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지막에 그 자연주의적인 행동을 성격으로 가져가는 건, 그가 특별한 어떤 일을 계기(서사적으로는 그게 이레네의 배신이어야 적당했겠지만)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앞의 두 '못난' 남자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는 속성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속성은 서사적인 관점에서 이레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 그가 다른 두 남자에게 승리한 것은, 예전에는 가지지 못했지만, 그리고 왜 하필 지금 그가 가져야 하는지 모를 그 '반문명적인 그윽함'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것은 그에게 주어져야 했는가. 달리 말하면, 그것은 왜 그는 애초에 다른 두 남자와 별다를 바가 없었나라는 질문과 직결된다. 이레네가 탈출극을 펼칠 때, 그는 두 남자와 마찬가지로 못난 사람이었다. 만약 뒤늦게 그게 바뀌고 세 남자 중 한 사람만 뭔가를 깨우친다면, 그는 예전부터 뭔가 다르다는 복선이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레네는 알았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였던 이레네가 그저 끝까지 남아 병든 자신의 배설물을 치워줬다는 걸 이유로 갑자기 그를 특별하게 여길 때(글쎄 어쩌면 마지막까지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가설도 생각해 볼 수는 있겠다) 어떤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그 정도의 친절은 과거의 그에게도 있었고, 이레네는 그것을 택하지 않았었다.
이레네와 하는 상상의 여행 이야기가 마치 현실인 것처럼 그들의 현재 시간에 섞여 동시간대로 서술되는 것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여행의 내용은 뭔가 지하철역에 붙은 아무 감흥 없는, 일출 풍경화를 보는 것 같이 고리타분한 면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안타까운 것은, 이레네가 자신이 만약 선택했더라면 달라졌을 그 세계의 이야기가, 점점 특정한 남자의 인생의 포트폴리오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서서히 주인공 자신의 인생 이야기로 바뀐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이레네가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게도 주인공이 이레네라는 인물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녀를 알 시간도, 숙성된 관계도 없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이레네는 그저 자신의 삶을 포트폴리오적으로 회상하는 주인공에게 '예술의 뮤즈'가 아닌 '삶의 뮤즈'라는 대상으로서 관측될 뿐이다(혹은 그 삶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게 만드는 산파가 되어줄 뿐이다).
.....내게 뭐라고 말 좀 해봐."
"난 어머니에 관한 기억이 두 가지가 있어...
-p306
그의 이야기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이레네의 의미는, 저 여자가 내 삶에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혹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철저히 대상적인 인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현실의 그녀가 하는 일은, 그의 인생사를 들어주고 위로해 줄 청자의 역할을 수동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이레네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등을 쓰다듬었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넌 만사를 다 훌륭하게 하려고만 하는구나."
-p291
3부의 말미에 이르러 이레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이 대사에, 이 소설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남성주체인 주인공은 무언가로부터 자신의 삶을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계단 위의 여자, 라는 어떤 '미술적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부터. 당연하게도 그가 오열하면서 추억하는 그의 가정사에는, 그가 여태껏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는 죽어가며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이레네의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온전히 그만의 포트폴리오였다.
그녀는 결국 계단 위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모르는 사이 뛰어내렸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독자가 목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첨벙,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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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문장.
나는 여러 모양으로 얼굴을 찡그려보았지만, 어떤 표정을 지어야 뺨에 그런 깊은 골이 패는지, 눈가에 그런 잔주름은 어떻게 하면 만들어지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세상을 향해 환희의 웃음을 지을 때, 아니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이 두려운 세상을 거부할 때?
-p301
또 무척 중요한 사물. 매트리스. 이것은 주인공이 이레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사물이었다. 예술적 재능과 막대한 부, 못난 두 남자가 가진 무기 대신 주인공이 이레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매트리스였다. 몸을 가누기 힘든 그녀가 누울 자리를 위해, 주인공은 매트리스를 발코니로도 옮기고, 산불을 피해 보트로도 옮기고, 배설물이 묻으면 빨고 말려 햇빛 냄새가 나게 만들기도 한다. 헌신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이것이 그저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처럼 단순하게 느껴져서 불만스러웠다. 그래, 첫째와 둘째 돼지와는 다르게, 셋째 돼지는 매트리스로 어필할 줄 알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