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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11. 2019

[인문과학] 이기적 유전자

'유전자를 위한 기계'

 


리처드 도킨스



꽤 전에 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니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이야기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 행동의 표현형의 근원이 생물학적(나는 그때 이 단어로 뉘앙스를 전하려 했는데) 동기나 충동에 결국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조금은 자조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결코 회의적이지는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태도를 전달하고 싶었지만, 역시 '생물학적'이라는 매력없는 단어 때문에 발화하는 나도 거부감이 조금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학교 2학년이던 꼬맹이 시절 동아리 생명과학과 선배가 지나가듯이 한 말, '남자들이 자기 계발하고 옷 골라 입고 노래방 가고 취직하고 밥먹고 (동아리 같은)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다 궁극적으론 여자에게 잘보여서 번식(?)하려는 생물적 명령을 따르는 거다'라는 참 멋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인간도 결국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해'라는 식의 중2스러운 말투 같기도 했지만,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굉장히 먼 길을 돌아서 그 목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으므로, 그 말에 대한 생각, 즉 인간성과 생물성이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사실 명확하게 내 머릿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하나의 숙제가 되어 있었다.


인간은 동물이다, 라는 말에 드는 직관적 반발감과, 그 말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회의적인 태도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그 사실 자체를 직시하며 사유한다면, 정말 인간은 '동물(행위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려 애쓰는 것이, 혹은 동일화 하려고 하는 노력이, 어느쪽이든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일단 내가 했던 말이 <이기적 유전자>의 논지와 비슷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 욕심을 내서 조금 궁극적인 그런 질문들을 심화시키는 데 이 책이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 해서, 나는 <이기적 유전자>를 꽤 긴 시간을 들여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논지는 좀 달랐고(리처드 도킨스는 다른 사실에 관심을 두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영감들은 몇 가지 떠올랐다.  


DNA를 위한 생존 기계


<이기적 유전자>는 꽤 긴 분량을 같은 논리를 다른 예시를 통하여 반복하여 주장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꽤 지치는데(예민하게 논리를 연결시켜가야하는데 자꾸 발을 멈추게하는 번역도 한몫), 어쨌든 정성들여 반복했기 때문에 강조하려는 사실은 또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 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 기계이다.'


이 개념이 재미있었던 것은 우리가 생명과 실존에 대해 흔히 생각하는 상식적 감각을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과, '나'라는 것이 철저한 단수적 존재, 즉 하나의 내가 있고, 나는 그걸 의식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라는 데카르트적인 자기의식이 어떤 객관적 사실 중 중요한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는 데카르트가 결코 마지막까지 부정할 수 없었던 이 사실을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부정한다. 인간인 '우리'는 DNA라는, 자꾸 자신과 같은 것을 불려나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진정한 '존재'가, 안전하게 세계를 누비고 다니고 자신을 불리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탑승한 하나의 전투 수트(아이언맨 같은)나 로봇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리바이어던처럼 수많은 세포가 모여 하나의 '나'를 이루고 있고, 세상에 무언가 '생물'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진 '나'이지, '나'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역할을 하며 돌아가는 세포 쪽은 아닐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의 견해에 따르면 차라리 세포 쪽이, 더 나아가 그보다 작은 단계이며 무수하게 많은 DNA쪽이 진정한 '생물'이며, 세계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발생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이러한 개념은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논지와의 비교를 처음부터 완전히 거부했다. 실존주의자든 어떻든 모든 논의는 인간인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이기적 유전자>의 논지에서 인간인 '나'란 전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탑승한 273번 버스 정도의 개념이랄까.


물론 직관적으로 그런 '나'의 자기의식이 그정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리처드 도킨스는 그러한 자기의식은 유전자가 번영하기 위한 수단적 방편의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발상의 전환이 일으키는 어떤 관점들은 굉장히 재미있는 상상을 가능케하기도 한다. 일단 카뮈가 죽는 순간까지 결코 해결하지 못했던 세계의 부조리- 즉 세계에 나는 존재하고, 나는 그걸 의식하는데, 나는 왜 영원하지 못하고 촛불처럼 어느 순간만 빛나다 사라지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왜 인간은 결코 (살아있는 동안)알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을까(이 부분이 '부조리'다)-를 간편하게 해결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영원한 건 유전자다. 인간은 뭐, 별로 안 영원해도 된다. 유전자가 탑승한 기계에 불과하니까. 타던 차가 오래되서 고장나는 것 정도야 큰 일은 아니지 않은가. 바꿔 타면 그만이다(번식).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판타지 소설 <로도스도 전기>에 나오는 마녀 '칼라'가 생각났는데, '칼라'는 아주 오랜 시간을 역사 속에서 살아온 마법사로, 자신의 영혼을 서클렛에 담아 여러 인간의 몸을 거쳐(서클렛을 쓴 사람은 새로운 칼라가 된다) 끝없는 수명을 이어오는 존재다. 유전자가 인간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방식의 완벽한 은유라고 볼 수 있다.


밈(Meme)과 확장된 표현형

    

다음으로 주목할만한 개념은 일단 '밈'이라는 개념인데,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적 사실을 하나하나 나열하기보다 그것을 응용해서 가정을 확장시키는 것을 즐긴다. '밈'이란 실체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문화, 즉 음악이나 윤리, 예술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서 유전자의 자기 복제성을 적용시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개념의 자기 복제자, 즉 생명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유전자의 문화에 대한 단순한 은유의 개념을 넘어선다). 그것은 유전자의 정의에 부합한다. 자신을 확장시키려 노력하고(창작자의 손을 떠나서), 그러기 위해 인간 등을 이용한다.  


분명 과학적으로는 조금 오버한 것이 아닌가 싶은 발칙한 상상력이지만, 문학적 영역에서는 어떤가? 일단 소설을 쓰려는 내 입장에서 보면 상상력이 자극되는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자연 법칙과 해명이 필수인 과학과는 달리, 문학은 가정이 곧 세계관이 되는 것을 허용하거나 혹은 권장하니까. 가장 비과학적인 '밈'의 개념을 소개하는 대목의 리처드 도킨스의 목소리가 또 가장 진지하다는 점은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 재미있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는 곳곳에서 의외로 쓸데없이 공상적이거나 낭만적이거나 긍정적이기도 하다.


'확장된 표현형'은 애매한 단어지만 일단 그가 가장 자신있게 자랑하는 자신의 사유이기도 하다(별책으로 있다). 그가 간략하게 소개한 바에 의하면 표현형이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유전자가 구성하는 생물의 몸체와 같은 것이고, 확장된 표현형이란 것은 그 유전자의 의지가 닿는 범위에 속하는 세계의 거의 모든 것까지를 표현형으로 취급한다는 개념이다. 즉 내 유전자가 살아가기 위해 이용하는 모든 외부적인 것들, 내가 입은 옷과 내가 고용한 보디가드나 내가 살고 있는 콘크리트 집까지도, 하나의 생물적 몸체로 본다는 개념이다. 이 아저씨도 세카이계 소설을 적고 싶어 한다는 작가적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웅대한 가정에로 열린 결말.


불만스러운 것들


어쨌든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인문과학 서적의 번역 문제야 늘상 있는 일이라고 치고, 리처드 도킨스는 아주 병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말로 간단히 할 수 있는 사실을 굳이 수학적 모델로 만드는 행위에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수의 딜레마'와 관련된 설명을 할 때 절정에 이르렀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동전을 두 번 던지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동전에는 앞면이 있고 뒷면이 있다. 이 때 일어날 수 있는 경우는 모두 네 번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 처음 던진 동전이 앞면, 그리고 뒤에 던진 동전도 앞면이 나오는 경우. 이 경우엔 어쩌고 저쩌고. 두 번째, 처음 던진 동전이 앞면, 그리고 뒤에 던진 동전은 뒷몇이 나오는 경우. 이 경우엔 어쩌고 저쩌고. 세 번째, 처음 던진 동전이 뒷면이 나오고 두 번째 던진 동전은 앞면이 나오는........(그리고 일목요연하게 그걸 또 표로 정리해서 보여준다)'. 어떤 중요한 반전이 있을까 요런 걸 다 읽고 확인하느라 진이 좀 빠졌다. (하지만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연구는 흥미로웠다)


또 이건 어떻게보면 불만이라기보다는 생물학에 대한 내 편견이 깨진 것인데, 생물학이라는 분야가 의외로 과학적, 증명적이라기보단 예언적이고 가정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생물학자들은(적어도 리처드 도킨스에 의해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과학자라기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탐정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현상에 대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다'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렇게 설명하면 말이 되기 때문에 이럴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중요한 대목마다 이 '것이다'라는 말이 의식적으로, 철저하게 쓰인다. 이는 근거와 증명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럴싸한 가정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다. 생물학은 신화적인 측면이 있고, 따라서 얼마든지 반론이 무럭무럭 자란다. '그러면 이렇게 해도 말이 되는데?'. 어쨌든 중요한 점은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가정에 확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꽤나 예언적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가지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보다, 새로운 관점과, 그리고 새로운 의문을 가져다주는 책이었다. 그는 주로 자연주의적 설명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동물이 ~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러는 편이 유전자 풀 속에서 그 수를 늘리기 쉽기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설명을 퉁치는 경우가 많았다. 현상에 대한 만능 열쇠처럼 사용되는 이 문구는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갈증만 일으키고 넘어가게 된다. 어떤 유전적 발현 현상에 대해 결과론적으로 설명되는 자연 선택설 역시, 다른 발현 상태는 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나지 않고 특정한 응집형으로 나타나게 되는지, 즉 '종'이란 것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종'이란 개념의 의미를 굉장히 축소시키는 리처드 도킨스는 애매한 말을 남길 뿐이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실제적으로 중요하지만, 필연이라 하기에는 이론상 불충분한 사실을 하나 추가해 두자. 그것은 이들 인과의 화살이 뭉쳐져 왔다는 사실이다. 이미 자기 복제자는 바닷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거대한 군체(개체의 몸) 속에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표현형 효과의 결과는 세계 전체에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동일 개체에 응결해 왔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는 그렇게도 낯익은 그 개체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발생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 뿐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이렇게 끝난다. 이 말은 응집된 '개체'에 대한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그는 아직 이데아와 싸워야 한다). 책을 읽으며 결코 해결되지 않던 의문이 이제 막 언급이 되려는 상태에서 끝맺는 것이 좀 아쉬웠다. 또 풀리지 않는 새로운 의문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얻었지만 갈증은 여전한 상태. 그런게 책인가보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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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음식 리뷰는 빠질 수 없다. 인상 깊은 음식은 역시 꿀단지 개미와 진드기 꽁무니에서 나온다는 꿀. 다큐멘터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물론 그 맛을 즐기려면 내가 개미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읽으면서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 생각이 많이 났는데, 여전히 그것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책이었고, 소설가란 직종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유쾌한 작품이었다. 거의 같은 주제를, 구차한 방어적 서술과 조심스러운 가정이 아니라, 상상력이라는 알리바이 아래서 마음껏 자유롭게 펼치는 대조적인 태도. 누군가는 증명하느라 발목이 잡혀야하지만, 누군가는 더 멀리 상상하면 된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역시 나는 후자가 좋다.   


-과학과 인간은 종종 대척점에 서곤 한다. 인간의 삶이 모두 과학이니 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나의 관점의 차이다, 라는 생각도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얼핏 폭력적으로 보이는 그 '과학적' 설명을 어디까지나 정면돌파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리고 둘은 결코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낯선 모습과 언어의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다. 둘은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라는 게 언제나 드는 생각이다.


-어쩌다보니 거의 처음으로 내용정리처럼 된 글.





(이미지 출처 - http://www.kyobobook.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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