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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04. 2019

[소설] 먼 북쪽

'소름을 돋게 한다'

마르셀 서루






'하루키'란 이름으로 광고를 하면 두 가지 효과가 있다. 그 이름을 싫어하는 사람이 편견을 갖게 만들 것이고, 그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맹목적으로 책을 집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라는 이름을 넣은 것은 후자 쪽으로 부등호가 열려 있으니 그런 것일 테다.


나로 말하자면 하루키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유니크한 질감에 질투에 가까운 매력을 느낀다. 세상 사람이 뭐라고 하건 차분하게 유지하는 그의 마이페이스도 좋고, 이미 유명한 그의 소설 쓰는 규칙적인 그만의 습관도 좋다(작가로서의 그를 생각하면 어쩐지 김성근 감독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의 취향이 나와 같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띠지에 적힌 문구로 사람들이 시니컬하게 내뱉는 말들을 떠올리는 것도 피곤하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하다. 출판업자가 뭐라고 적어놓은 띠지를 떼어버리고 깨끗해진 책의 첫장을 펼치면 된다(띠지나 표지에 미련이 없는 타입이라 가능한 일이다). 


근미래 아포칼립스


나는 언젠가 근미래 아포칼립스 장르의 단편소설을 습작으로 썼던 적이 있다. 그것은 '장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유행하는 스타일인데 장르라는 것의 장점은 낯선 정보들을 가지고도 소설의 맥락에 진입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처음 보여주는 몇 가지 분위기 만으로 나는 이 소설의 장르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만들었던 세계와의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점들과, 같은 장르에도 전혀 다른 서사의 흐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소설처럼 그곳은 물과 책과(아주 약간의 통조림과) 종교가 있는 종말적 세계였으며, 다른 점은 온도였다. 그곳은 북쪽이기에 추웠고, 물은 얼었고, 단지 그 차이점이 내 소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냈다.  


가장 북쪽에서 나침반의 바늘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소설은 여행을 하는 이야기다. 종말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던 메이크피스의 삶에 별안간 비행기 한 대가 떨어지는 것으로 그녀의 여행이 시작된다. 그녀는 자신의 북극성을 따라 앞으로 많은 역경을 만나게 될 차가운 길을 걷기 시작한다. 


여행에는 언제나 목표가 있다. 그녀는 이 길의 끝에 아직 문명의 힘을 잃지 않은, 자신의 고독을 달래줄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그녀가 마침내 여행의 끝에서 비행기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만나게 된 것은 그녀의 운명을 바꿔놓았던 과거의 잔재였고, 결코 '끝'이 아닌 어떤 것이었다. 그녀는 총으로 그것을 쏴버렸다. 


북쪽 땅에 신의 뜻에 충만한 세계를 건설하려는 그녀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겐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문명을 버리고 척박한 땅으로 여행을 한다.


모든 여행이 다다르는 '북쪽'이란 그 여행의 완전한 목표다. 그것은 또한 일종의 '구원'이며 '종말'이 아닌 또 다른 '끝'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추구한 그 '끝'에서 나침반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가장 북쪽에서 더 이상 가리킬 북쪽이 없어진 빨간 바늘은 '방향을 잃고 무기력하게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신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자신의 여행의 끝에서 딸의 얼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스스로 면도날로 목을 그었다. 


구원이란 그렇게 난해한 것이다. '도달'할 수 없지만 '존재'해야 하는 것.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이 우리 손에 잠시 머물러 있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메이크피스는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전과 같았지만 그러나 새로운 세계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은 곧 '끝'이 나겠지만 그 다음 또 여행을 떠날 누군가의 몸에 어느새 축적되어 있는 생명력.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는 다음의 여행자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소름을 돋게 한다


하루키는 그런 말을 했다. '정말 소름이 돋나 한 번 보자'라는 자세로 책을 읽게 만드는 문구다. 하지만 책 자체의 내용은 '소름이 돋'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흔한 종류의 근미래 아포칼립스 여행담이고, 뛰어난 문장이나 철학적 사색이 나오지도 않으며 매력적이거나 집요한 종말 여행의 묘사도 없다. 그저 담담한 성격의 주인공의 여행과 그녀를 가로막는 몇몇 위기들이 있을 뿐이다. 유일하게 등장하는 러브라인(?)은 깊이도 없고 효과도 없고 뜬금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소름이 돋는다'는 포인트는 따로 있다. 이 세계의 무대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체르노빌이며 그러한 문명적 원인의 종말론적 불모지다. 그리고 일본은 그런 세계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아포칼립스' 장르는 한국에서보단 일본에서 더 유효할 것이다. 9.11 이후로 미국이라는 세계가 변화했듯이,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로 그들의 세계는 바뀌었다. 한국에서야 여행을 갈 때 꺼려지는가 아닌가 정도의 인식에 그치겠지만,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종말에 발을 걸치고 있는지 아닌지 언제나 고민하고 위안하고 속이고 무시하고 불안하고 좌절하고 희망하는 그 정체성의 진동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엽적인 사건이 아니라, 세계 문명의 운명에 대한 메타포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하루키가 이러한 메타포에 민감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낱 픽션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오는 메타포의 힘 앞에서, 그가 소름이 돋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돌이켜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름이 돋는가? 








- 정말 쭉 읽히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힘이 드는 나는 집중력 장애인가 난독증인가.


-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오는 음식을 기록하는 소설음식노트를 만들어 보고 싶다. <먼 북쪽>의 메인 요리는 순록고기. 인간의 캠핑 본능을 자극하는 모닥불과 함께.


- 기억에 남는 문장이나 인상 깊은 장면은 없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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