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근미래 판타지
에반게리온 2015년. 원더키디 2020(8달 남았다)년. 팬텀 2040년. 백 투 더 퓨처 2015년. 근미래 판타지는 곧 다가올 사회를 허구로 예언한다. '먼' 미래의 다른 세계가 아닌, '곧' 다가올 우리의 세계를 다루는 이 장르의 재미를 예언이 얼마나 실행되었는지, 혹은 실행될 가능성이 있는지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문학이 허구와 얼마나 친근한 장르인지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뭐, 맞아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 정도의 가벼운 호기심으로 그런 작품들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겨우 그 정도라면, 근미래에 대한 예언적 정확성에 관심을 끄고 이런 장르를 대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도 이 장르가 매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가올 낯선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지금 세계와의 동질감과, 결국 도래한 그 세계가 예측된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이질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시간은 흐르고 지금 시점에도 많은 근미래 판타지들이 예측한 '미래'는 '과거'가 되어 버렸다(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결국 근미래 판타지들은 언젠가는 과거가 되기 마련이다. 한때 미래에 대한 상상력으로 이 텍스트(영상물을 포함한)들이 읽혔다면, 이제 그 시간이 지나간 시점에서 그 텍스트들은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결국 그 작품들이 과거 세계의 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많은 경우, 애초에 관심사는 그들의 현재이지,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그들의 미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1984년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봐도 참 먼 과거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던)그 '미래'의 모습은, 사실 훨신 더 과거, 예를 들면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썼던 1940년대 후반의 분위기와 더 닮아 있다(살아보진 않았지만서도). 애초에 인간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이 예측하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확장이며, 그것은 실제로 시간이 지난 이후 존재할 그 미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결국 <1984>는 사실 <1948>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상력이 발휘되어 나타나는 미래형 발명품들, 예컨대 '텔레스크린'과 같은 것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묘사되기로 소리와 움직임을 송수신하는 '금속판'인 텔레스크린의 모습을 아이패드니, 영상통화기니 하는 것과 연결시켜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미래형 발명품들은 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과 세계가 투영된 은유물이라는 사실이다. 애초에 기술적 실현가능성이나 시장성, 재질 등에 개연성 확보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문학에서, 굳이 등장한 그 사물들은 결국 무언가의 메타포다. 텔레스크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기한 미래의 금속판이 아니라, 조지 오웰이 집필 당시 그 세계에서 느끼고 있던 '감시' 그 자체다. 결국 그 끝에는 사람의 눈이 있고, 이 소설은 그 눈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독백과 한계
이 소설이 관심이 가상의 세계에 대한 묘사와 즐거운 상상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와 인간에 대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2부, 3부를 거치며 더욱 명확해진다. 그래서 나는 가상 세계관의 확보에 관심을 두는 일반적인 SF류의 소설과 이 소설을 구분하고 싶다. 사실 내가 항상 관심이 가는 것은 전자와 같은 부류인데, 작가 자신의 특징이 하나하나 벽돌처럼 쌓여 만들어지는 그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 어쩌면 문학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즐겁게 보았던 부분은 1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에게 끌려가는 3부는 갈등과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그들이 이젠 세계를 묘사하기를 완전히 그치고, 단순히 작가의 의견 표현을 위한 꼭두각시가 되어서 작위적인 말 주고받기만 수십 페이지에 걸쳐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작가의 독백에 불과한데(그가 비판적인 사회의 속성에 대한 직접 설명), ~하네, ~일 뿐이네, 하는 일방적인 말투와 결합되어 꼭 RPG게임 등에서 최종보스가 주인공 일행에게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자신 나름의 철학을 친절하게 설명하곤 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장면보다 식당에서 최근 품귀현상이 일어난 면도날에 대해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는 윈스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던 것은 왜일까. 나는 6개월동안 하나의 면도날을 쓰는 것에 대해(그러한 삶에 대해) 꽤나 깊게 고민했는데,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 그 유명한 빅브라더와 냉전, 감시에 대해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감수성을 새삼 일깨우는 것보다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근미래 판타지라는 장르의 예언적 속성의 한계이며, 한때는 최첨단의 감수성이었던 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되어버린 이후에 그 본연의 장점을 잃어버리고, 단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인정해야할 '의의'를 갖게 되어버리는 것이 조금 슬프기도 하다.
푹신한 안락의자와 열두 시간으로 표시된 구식 유리 시계가 똑딱거리는 방
디스토피아, 라는 말로 많은 사람들이 <1984>를 소개하지만, 어쩌면 이 소설은 아주 짧은 순간의 유토피아를 묘사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쇼생크 탈출>에서 느꼈던 것이지만 억압과 비자유의 장면이 길면 길수록 짧고 평범한 자유의 순간은 강렬하게 보인다. 빅브라더의 세계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너무나 일상적인 공간을 혼자 누리며 이가 끓는 침대에 줄리아를 데려와 뒹구는 상상(그리고 현실)을 하는 장면들은 분명 단순하지만 빛나는 장면들이었다. 여운 따위 없는 구성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우리는 죽은 목숨이에요"
윈스턴이 말했다.
"우리는 죽은 목숨이에요."
줄리아도 그 말을 따라 했다.
"너희들은 죽은 목숨이다."
그들 뒤에서 금속성 목소리가 들렸다.
소설에서 최고로 귀여운 장면이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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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음식은 30그램에서 20그램으로 배급량이 줄어든 초콜릿.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의 <과두적 집단 이기주의의 이론과 실제>를 직접 친절하게 읽어주는 장면은, 소설의 설정집을 따로 읽는 것처럼 끔찍했다.
-'이중 사고'와 독재를 위해 현재와 미래가 아닌 '과거'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1984>의 특징적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