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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6. 2018

[그래픽 노블] 왓치맨

'물음표를 던지는 히어로'

앨런 무어,  데이브 기번스


'오늘 아침 골목에 널브러진 개의 시체.

그 터진 배 위로 그려진 타이어 자국.

이 도시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이 도시의 진짜 모습을 보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한 남자의 일지다. 그는 협소한 정의관을 가졌고, 폭력적이며, 과대망상적이고 음침하며 특징적으로 못생겼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코트를 입은 채 술집에 들이닥쳐 누군가의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릴 때는 암흑가의 야비한 악당들조차 겁에 질려 떨면서 자비를 구걸하는 무시무시한 히어로이지만, 또한 마스크를 벗었을 때 그처럼 못생기고 초라해지는 사람이 있을까. 


이 만화(나는 이 작품이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쉽게 '만화'라고 부르고 싶다)의 화자이자 한 걸음 비껴간 주인공인 로어셰크는 여러모로 인상적인 히어로다. 대니얼, 로리, 존, 코미디언... 누구를 중심에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 만화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지만 그 중 한 명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면 아마 그것은 이 음침한 히어로인 로어셰크일 것이다. 그가 어째서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보는 과정은, 곧 이 만화가 암시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를 따라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익숙한 히어로의 공식이 있다.

1. 서사의 과정에서 중심적으로 자주 노출되어야 한다.

2. 착한 심성의 소유자여야 한다.

3. 아름다운 여자(히로인)와 러브라인이 있어야 한다.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이 조커가 아니라 배트맨이었던 것처럼, 이 만화의 주인공은 얼핏 2대 나이트 아울인 대니얼처럼 보인다. 위의 조건 외에도 그가 주인공일 수 있는 자격은 많이 있지만, 물론 이 만화는 의도적으로 어느 누구도 주인공에 100% 부합할 수 없도록 곳곳에 공간을 비워 놓았다. 대니얼, 로어셰크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 모두에게도, 중심 서사에서의 소외와 그로 인한 사각이 존재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불안정한 '히어로'들이고,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만화가 최초에 로어셰크의 음침한 목소리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바깥에 입는 삼각 팬티와 빛나는 히어로 심벌, 펄럭이는 망토 대신 하수구를 타고 흘러내리는 개의 불결한 피로 시작되는 이 만화는, 분명 일반적인 인식의 '히어로'라는 어떤 상수를 염두에 두고 조금 다른, 일반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해보려는 것처럼 보인다. 2010년대를 히어로물의 범람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긴 하지만, 아마도 그 범람의 시대는 <왓치맨>이 만들어진 1986년 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서 쉽게 대적할 수 없는 악당들을 손쉽고 화끈하게 부수면서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부여하던 과거의 히어로물, 그 일반적인 히어로물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명한 '느낌표(!)' 대신, 이 만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바로 낯선 '물음표(?)'이다. 그들이 이번에는 누구를 누구로부터 구할까! 라는 기대감 대신 주어지는 것은 그들은 도대체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구하려는 것일까? 하는 딜레마적 물음이다. 정말로, 그들이 구하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구하려는 그들은 누구이며, 구해지는 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을 위협하던 자들은 누구인가? 애초에 그 주체들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작중에서 언급한 바처럼 신문, 광고전단, 해적소설 등의 다양한 채널을 동원한 '컷업 테크닉'으로써 표현되는 전체적인 갈등은 간단하게 이렇다. 냉전과 핵무기의 발달, 죄수의 딜레마적인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군비확장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핵전쟁의 운명으로 인류를 이끌고, 그것을 막기 위해 바이트는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일련의 소동을 벌여 외계인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어 파멸적 운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한다. 


'구원한다'로 줄거리가 마무리될 수 있는 이유는 물론 그들이 실제로 구원되었기 때문이다. 더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잔혹하지만 어쨌든 비교적 적은 희생을 통하여. 이 갈등 서사의 모티브는 물론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떨어졌던 핵폭탄과, 그 가공할 위력으로 인해 지금껏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오는 어떤 억제력일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최선의 정의다. 그저 탄두리 테이크 아웃이 바라는 모든 것이었던 사람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금발을 하고 신분을 바꾼 대니얼과 로리는 히로시마 연인의 낙서처럼 그들의 사랑을 이어가고, 여전히 살아남은 죄없는 사람들은 한층 나아진 평화를 마음껏 누린다. 이제 갈등은 사라지고 인류는 멸망의 운명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엔딩의 풍경은 그렇다. 가장 태평한 평화를 상징하는 햄버거와, 새콤달콤한 케첩. 짧은 만담. 유치한 색의 스마일 마크. 약간의 코미디. 그리고 피. 


"Do it!"


그 피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무력한 한 히어로의 절규를 떠올려볼 수 있다. 새하얀 설원 위에 선명한 핏자국을 남기고 전지전능한 인간에 의해 분해되어버린 로어셰크는 그렇게 이 만화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모두가 새로운 유토피아에 죄책감과 눈물을 가지고 그러나 승선할 때, 아마겟돈이 와도 타협할 수 없다며 섬광 앞에서 서로를 감싸 안고 사라져간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 히어로. 그는 실제로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그의 의견이 관철되었다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를 히어로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퀘스쳔 마크(?)를 남기는 히어로다. '이 도시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그를 통해 정의의 속성을 본다. 결코 완벽한 정의의 법칙이 존재할 수 없기에 세계에 구현된 '최선'의 정의가 지닌 원초적인 두려움에 대하여. 한 치의 티끌도 없는 정의는 구현될 수 없고, 구현된 정의는 언제나 정의롭지 못한 무언가를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아주 작은 균열일지라도, 균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정체성으로 하고 있는 정의라는 탑을 존재적으로 무너뜨리기에는 언제나 충분하다.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으로 남은 그는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의여, 너는 정의로운가?' 

'Who watches the watchemen(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 


'최선의 정의'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그 질문은 언제나 유효할 것이며, 정의는 지워지지 않는 두려움을 간직할 것이다. 언제나 중심의 한 편에 슬쩍 비켜서서 지워지지 않는 단호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히어로, 로어셰크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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