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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7. 2018

[소설] 인간 실격

'그'

다자이 오사무



공감하지 못했다.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만의 세계에 침잠해있다. 타인을 만나는 게 두렵다.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 추워지는데 입을 옷이 없다. 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진다. 가끔 일이 있어 나가면 자동차 소리에 놀란다.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지나칠 자신이 없다. 누군가에게 활발하게 의견을 말하곤 했지만, 이젠 그런 것들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새삼스럽게 신경쓰기 시작하자 소름이 돋는다. 나갈 일이 있다면 핑계를 대고 싶다. 


새로운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면 그럴싸하다. 소설의 인물을 만들어 놓고 그 설정에 몰입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 설정을 핑계삼아 나를 소설 속에 노출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는 않지만. 스트레스 받기는 하지만 어느정도 스스로 즐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나와 같을 것이다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많은 조건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세계에 침잠할 것이고, 자신의 문제로 고민할 것이다. 타인과 나. <인간 실격>을 읽은 것은 정해놓고 기대하는 바가 80%였다. 그의 세계가 궁금했다. 


실망은 아니었다. 애인과 함께 물에 몸을 던지는 그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광염소나타>와 비슷한 정도의 미학적 치열함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역시 옛날 작품이고 그런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 납득했다. 광인, 병, 예술, 죽음. 분명히 아직까지도 영향력 있는 묶음이다.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점은 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서로 다른 층을 걸으며 통화를 하는 두 사람처럼, 나는 그와 섞이지 않고 서사를 따라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자해


결정적으로 달랐다. 그는 나와 다른 인간이다. 다자이 오사무든, 그의 화신인 요우죠우든.  


'부끄러운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소설(수기)은 그렇게 시작한다. 이 길고도 짧은 수기가, 결국은 윤리의 문제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다. 죄와 속죄의 문제이다. 나는 많은 소설에서 티끌 없는 윤리를 마련하고자 치열하게 싸우다 좌절하는 여성화자(작가)와, 이미 죄는 가졌고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남성화자(작가)를 많이 보았다. 난폭한 분류 같긴 하지만 스스로 통계적으로도 자주 볼 수 있었고, 거기엔 생물학적 이유가 있다는 내 나름의 생각이 있지만 여기서 밝힐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인간 실격>은 후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거의 존재적 죄의식을 가지고 주인공은 평생을 괴로워한다. 결국 궁극적으로, '타인'의 앞에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죄이다(특히나 남성 주체는). 


그렇다면 속죄는 어떻게? 존재라는 죄를 어떻게 속죄하나? 그러나 사실 그는 죄에서 구원받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그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존재적 죄인이므로 타인과 갈등하지 않는다. 권리는 오직 타인에게 있고 자신은 피하고 숨고 도망친다. 타인의 억압에 자신도 같은 편이 되어 자신을 억압하고 나무란다. 그것이 그의 윤리가 실행되는 방법이다. 스스로의 죄를 심판하는 것. 그렇게 그는 윤리를 마련한다. 그것을 나는 자해라고 부른다. 


여성화자와 남성화자의 윤리법의 차이를 말하긴 했지만, 또 많은 경우에, 그것은 같은 귀결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자해는 윤리적이다. 내가 나에게 행하는 폭력은 부당하지 않다. 더군다나 내가 죄인일 경우에, 내게 '티끌'이 있을 경우에, 그것은 윤리를 집행한다는 쾌감마저 불러온다. 폭력성을 표출하는 쾌감 또한 덤이다. 


'서사적으로' 요우죠우는 끊임없이 자해를 한다. 내키지 않는 '우스운 행동'을 해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고, 돈을 허무하게 써버리고, 술과 약에 중독되고, 폐병에 걸려 각혈을 하고, 부인을 외간남자에게 강간당하고(부인이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당시 일본의 개념 하에서), 자살시도를 하고, 경찰서에 가고, 미친사람 취급을 당하여 마침내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자신을 욕보이는 하녀밖에 없는 세상의 어느 막다른 집으로 스스로를 몰아가고. 


그것이 요우죠우 본인의 의지라기보다 상황이 주는 시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소설의 상황과 서사는 작가가 주인공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다. 주인공이 작가를 대변한다고 한다면, 서사는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주인공을 폐인으로 몰아가며 그만의 윤리를 집행하고 있는, 그리고 쾌감을 느끼고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자해란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누구도 나를 탓할 수 없는, 나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 너무나도 윤리적인 폭력. 타인과 갈등하지 않기로 정한 한 주체의 자해는 결국 자살로 귀결된다. 그럼으로써 그(이 '그'가 다자이 오사무인지, 요우죠우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다)는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죄로 규정한 세계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비극적인 방식으로. '비극'이라는 용어가 승리의 여운을 짙게 만든다. 나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승리'의 'ㅅ'자도 머리 속에서 언어화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가 그의 승리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또한 장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자해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앞서 말했듯 다른 층에서 통화를 하며 걷는 것처럼 서사와 사유를 겉돌았다. 윤리가 자해로 끝나는 귀결은 너무나 지루하고 비겁하다. 그것은 예술이란 이름 하에서 흔하게 근사해보이고 추앙받기도 하지만, 이미 너무나 촌스럽게 되어 버렸다. 그림이니 압생트니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결국은 일종의 어리광에 불과하다. '그'는 어떤 점에서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동료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쉬운 길로 훌쩍 가버린 것이다. 비극적인.


코미, 트래


담배는? 트래.


주사. 트래.


죽음은? 코미, 목사도 스님도 마찬가지지.


폐인은 아무래도 희극 명사. 


그러면 코미는?


'그'가 만약 망설임 없이 '트래'라고 말한다면, 이야기는 돌고 돌고 돌아서, 트래를 쓰려던 그는 의외로 코미를 쓰게 되었을까. 자해도, 투쟁도 하지 않으려는 죄인은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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