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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8. 2018

[소설] 에브리맨

'죽음이라는 묵직한 스포일러'

필립 로스



이런 종류의 글은 내게 큰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일단 나는 한 인간의 생애를 통틀어서 서사를 구성하는 글을 좋아하지 않고,

현실적인 인생과 상식적인 직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가족들이 (비중을 가지고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말해버릴 수 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취향과 작품성은 별개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그런 것들이 취향이거나, 혹은 절실한 문제일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다. 


<에브리맨>은 그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내겐 '내장 공포증'이 있다. 나는 몸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엔 의연히 대처하면서, 혹은 견딜만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편이다. 그러나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턱없이 무력하고 솜털 같은 징조에도 지레 겁을 잔뜩 집어먹게 된다. 핏줄과 혈액순환, 가끔씩 느껴지는 몸 안의 이유를 모를 통증, 더부룩한 속, 답답한 숨(나는 결핵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우리들 주위엔 건강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날 병 하나를 얻어 처절하게 몰락해가는 경우가 어디에나 널려 있다. 그 형벌과 몰락은 너무나 지독해서 그 사람이 평생을 걸쳐 가다듬은 인격과, 성실하게 가꾼 삶의 터전을 너무나 간단하게 무너뜨린다. 인간은 순식간에 존엄성을 잃어버리고, 차가운 타일 바닥 같은 현실에 맨몸뚱이로 뒹굴며 그저 죽음이 닥쳐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의 의미를 무로 돌려버릴 순간을 굴욕적으로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될까봐, 차가운 수술대에(도마 위에 오른 생선의 기분을 직접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정말 끔찍한 경험이다) 사소한 계기로 오르게 될 까봐, 나는 수시로 내 몸 안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내장들에게 지금은 안녕하시냐고 묻고 싶지만, 그들은 언제나 묵묵부답이다. 가끔, 불길한 징조를 초인종 누르듯이 하나씩 보낼 뿐이다. 


'그'의 삶은 그랬다. 그는 핏줄과 싸웠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 같은 걸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빨간 액체는 핏줄을 제맘대로 돌아다닐 뿐이다. 그러다 뭔가에 의해 막힌 막다른 골목에 도착하면, 제맘대로 핏, 하고 터질 뿐이다. 그 골목이 하필이면 어디였는지에 따라서, 한 인간의 삶은 쓰레기통의 바나나껍질과 다를바 없는 신세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그저 쇳덩이든 플라스틱이든, 몸의 어느 곳에나 주렁주렁 다는 것 밖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것을 달면 달수록, 그는 존엄스럽다고 생각했던 인간에서 점점 멀어진다. 


이것은 노년과, 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비록 전 생애를 다루기는 하지만). 죽음을 앞둔 인간에 대한 담백하고 진지한 이야기다. 이제 앞에 남은 것이 너무나 짧고, 뭔가 하기에 육체적 에너지 자체가 너무나 부족할 때, 예고 없이 '끝'을 알릴 자명종을 보이지 않는 뒤통수에 달고 다닐 때, 그 순간에도 자신이 쌓은 업보 때문에 이제 바로 옆에서 손을 잡고 위로해줄 사람조차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그런 자신과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주위에 만연할 때.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가 전신마취를 하지 않고 자신의 경동맥 수술을 제정신으로 온전히 느꼈던 것처럼, 그는 죽음을 어떤 마취(종교나 이데올로기 같은)도 없이 온전히 인식하고자 한다(전신마취를 택하자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묘지를 찾아가 자신이 죽으면 누울 자리가 어떤 것인지 인식한다. 네모반듯하고, 바닥은 평평하고. 깊이는 2미터 정도. 멋있어 보여서, 구멍으로 한번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도 들어야 하는 흙구덩이. 그것을 그의 부모님을 묻었을 그 흑인 인부가 팔 것이다.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죽음을 온전히 인식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를 피해가는 것도, 그렇다고 그가 거기에 의연하게 대처할 마음이 든 것도 아니다. 그럴수록 그의 소망은 과거를 향한다. '대서양의 큰 파도를 타고 해변까지 단숨에 들어오던, 늘씬한 작은 어뢰처럼 상처 하나 없는 몸'. '짠물과 살을 태우는 태양의 냄새'. 그라는 인간이 지녔던 생명성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그 때의 찬란한 빛이 멀고 먼 노년의 이 한 구석에 조금이라도 닿기나 할까. 기억을 떠올리며, 아주 잠깐 그 빛을 조금 쬔 것 만으로, 그는 그렇게 죽어버린다. 마지막까지 시계바늘은 0.1mm도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이야기가 아닐 테다. 제목처럼 그것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운명일 것이다. 


마취 없이 제정신으로 수술을 받는 것처럼, 이 책은 평범한,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익숙'해질 수 없는 죽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하다. 까뮈의 <이방인>이나 카프카의 <심판>과 같은 소설들은 전신 마취를 한 상태에서 죽음과 실존을 치열하게 상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에브리맨>은 오히려 자비가 없다. 노년을, 죽음을 아무리 포장한다고 해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그 공포와 절망을 생생하게 중계한다. 마지막에 '뼈들이 해준 말' 때문에 잠깐 기운이 솟으며 과거를 추억하던 그의 모습은 그저 '국부마취' 정도는 될 것이다. 


<에브리맨>의 우울한 마지막장을 덮으며, 나는 수술을 하려면 역시 마취를 제대로 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인간에게는 아무래도 마취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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