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회로 라디오'
치유물의 조건
치유물엔 두 가지가 필요하다. 문제 되는 상황을 만든 원인(그에 따른 증상),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되는 방안. 이 두 가지 자리에 다양한 요소를 대입함으로써 치유물은 여러 모습으로 변주가 가능하다. 인간은 언제나 고통(스트레스) 중에 있고, 항상 치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치유물이라는 '장르'는 장르라는 구분이 아깝게 거의 문학(혹은 예술)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한다. 현대인이 가진 고통의 상황적 묘사와, 말미에 제시되는 어떤 얕은 희망을 암시하는 여명의 흔적과도 같은 것. 익숙하지 않은가? 많은 소설들은 이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걸 매너리즘이나 한계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이미 문학의 한 방법을 넘어서서, 차라리 문학의 목적 중 하나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관건은 변수다. 상황과 대안. 많은 소설들은 다양한 시각으로 세계의 문제성을 진단하고 있고,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대안책을 제안하고 있다. 전자는 비교적 쉬운 작업인 반면에, 후자는 언제나 극도로 조심스럽다. 누구나 세상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선 입을 닫거나 기껏해야 일반론적인 의견을 두루뭉술하게 제안할 뿐이지 않은가. 경우에 따라서 소설은 단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만 치중하는 경우도 많다(물론 멀지 않은 과거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나 명령에 더욱 치중하던 시절도 있었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구호적이고 작위적이며, 결국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낼 뿐이니까. 그래서 현대소설들은 '세계의 문제를 일깨워 독자를 겨우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어떤 타협적인 자신의 포지션을 만들어냈고, '불편하게 만든다'는 개념은 일종의 겸손을 가장하여 문학적 태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많은 소설들이 이 지점에서 멈춰버렸다.
그래서 현대의 독자들은 불편하다. 실은 세계의 문제성에 실시간으로 노출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그런 문제성의 재상기는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그들은 사실 스트레스의 배출과 해소를 원하지만, 이제 소설은 그런 저급한(혹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독자들이 소설을 접할 때 느끼는 것은 오로지 너무도 익숙한 그 차가움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의 문제를 언제나 인식하고 환기하기 위해 기꺼이 그런 소설을 접하긴 하지만, 사실 우리의 육체는 어떤 종류의 따스함을 언제나 바라고 있다. 우리는 '실은' 치유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꿈같은 대안
<킵>은 재미있게도 반대의 포지션에 속해 있다. 이 소설에서 세계에 대한 문제 인식은 조금 심심한 편이다. 통신 중독자인 대니는 자신이 통신망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에 굉장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것을 확장시켜서 세계와의 연결성에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하워드에게 어릴 적 심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또한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실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대니는 시종일관 접시 안테나와 하워드의 무전기 등 통신장비에 집착을 보이지만, 이 중독증상은 핵심적인 것이라기보다 액세서리처럼 대니의 중독상태를 꾸며줄 뿐이다. 그는 단지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그런 상태가 필요한 것일 뿐.
<킵>에서 관심을 두고 진행시켜나가는 부분은 바로 '대안'적인 부분이다.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대니, 하워드, 믹, 소설 밖의 인물인 레이와 홀리 또한. 그들은 서로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하나의 대안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 즉 '킵'이다. 이 소설의 분량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는 이 대안 세계에 대한 충실한 묘사이다. 성으로 은유된 이 세계는 현실과 차단된 환상적인 공간이다. '차단'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현실의 문제와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대안이라는 사실이다. 즉, 당신은 마약 중독자이니까 평소에 운동을 자주하고 물을 많이 마시고 일에 탐닉해서 중독 증세를 끊도록 노력해보세요, 라고 하는 식의 진단과 처방의 과정이 아니다. '킵'의 세계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차라리 독립적인 꿈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저마다의 문제를 가진 인물들이 중세풍의 성에 모인다. 그리고 그 성과 관련된 소설을 읽는다. 마치 '빨간약'처럼 맥락 없이 모두에게 공유된 이 엉뚱한 처방은 어떤 힘을 발휘할까.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인 레이와 홀리의 시점에 맞춰 생각해보자. 그들이 교도소에서 열린 문학 창작 시간에 공유한 것은 무엇인가. 레이는 자신이 만들어낸(혹은 믹으로서 직접 겪은 고백체의) 소설의 세계에 홀리를 초대했다. 그 이야기를 쓴 레이는 물론이고 홀리 자신도 그 성의 숙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상의 공간. 그 공간을 레이의 감방 룸메이트인 데이비스의 표현을 빌려 '주파수'라고 표현해보자. 그들은 원래의 세계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엉뚱한 주파수 채널에 우연히 모인 사람들이다. 절대 작동할 것 같지 않은, 먼지로 만들어진 회로의 상자 라디오로만 들을 수 있는. 신기하게도, 그 존재하지 않는 주파수에 모여서야, 그들은 서로의 문제를 경험한다. 대니는 사촌인 하워드의 어릴 적 공포를 함께 체험하고 이번에는 그를 구원해주고, 홀리는 친구를 쏘아버린 레이의(아마도 믹이었을) 과거와 공명한다. 현실의 문제는 사라지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같은 주파수대의 공명. 거기서만 들을 수 있는 서로의 목소리를(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알토를 느낀다. 같은 주파수대의 공명, 즉 알토는 문제 자체의 해결은 아니지만, 사실은 문제와 상관없이 정말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건은 단 하나다. 세상과 차단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엉뚱한 주파수. 처방이 아닌 치유는 바로 그런 곳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상상과 환상만이 할 수 있는 일.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