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읽는 느낌에 따라 구별되는 책의 종류가 있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도 않고, 의무감으로 읽고 나서도 그다지 남은 게 없는 숙제 같은 책.
아껴가며 읽게 되는 책.
집중해서 읽어야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책.
특정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활자가 필요해서 읽는 책.
인생책.
첫장만 보고 덮은 책 모양의 종이 뭉치.
살아가며 자꾸 생각나는 어떤 책.
내 무언가를 만든 책.
이렇게 경험이 쌓이다보면 나중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책을 뽑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많은 경우에 목적과 읽고 난 후의 결과가 다르기 마련이다(대부분 표지 등의 겉모습과 내용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일). 그런데 간혹 목적과 결과가 같은 경우가 있기도 하다. <템테이션>은 정확히 그랬다. 룸메이트의 책꽂이에 꽂혀 있었고, 나는 언젠가 그것을 본 모양이었다. 소설을 잘 읽지 않고, 씨름하며 읽어야 하는 책들과 정말로 씨름하던 최근에, 나는 문득 '소설' 같은 소설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이 <템테이션>이었다.
'소설' 같은 소설이라니? 소설을 정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고 똑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며 그렇게 고생을 하는 판에, 나는 함부로 '소설 같은 소설'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나.
<템테이션>을 읽고 난 뒤에 나는 그런 말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하루에 책 50페이지를 읽으면 지쳐 쓰러지는 내가 거의 3일 만에, 그것도 마지막 300페이지 가량을 하루만에 읽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템테이션>에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굉장히 의도적으로 장치된 것이었으며, 나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것이 소설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분명 몸을 담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갈증
<템테이션>은 내 기준으로 보자면 자신의 이야기와 세계에 애정이 없는 소설이다. 나는 소설의 몸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묘사들과 분위기 조성, 감각적 장치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다. 작가들은 '소설' 이전에 '세계'를 먼저 낳고, 그 세계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 세계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다. 묘사와 분위기, 감각이 진하면 진할수록, 서사가 멈춰있는 순간이 길면 길수록, 장면(scene)이 강조될수록, 작가는 그 소설, 그리고 소설 이전의 그 세계에 애정을 듬뿍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템테이션>이란 소설의 대부분은 따옴표 안에 들어간 대화들과 간략한 소품 묘사(주로 인물들과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그리고 필수적인 상황 설명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거의 어떤 장면과 공간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었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거의 유일하게 그럴 만한 공간은 '사프란 섬' 하나 뿐이었다. 거기엔 애정이 조금 담겨 있는 듯).
<템테이션>의 몸을 이루는 것은 눈에 보이는 요소가 아니었다. 나는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는 대사와 장면들 사이에서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휙휙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바람처럼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그건 '이야기'였고, 좀더 부정확하고 전문적으로 말하면 '서사'였다. 작가가 거의 유일하게 애정을 가진 것, 그리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많이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 다급한 의지에 등이 떠밀려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이야기를 주워 먹었다(이 표현이 정확했을 것이다). 평소처럼 한문장 한문장을 읽으며 그가 소중하게, 혹은 무의식적으로 던진 어떤 사물에 주목하거나, 무대처럼 열심히 꾸민 세계를 음미할 여유도 없었다. 수많은 단어를 흘렸고 사람의 이름은 까먹었다. 주인공인 데이비드가 몰락하는 그럴싸한 과정에 비해 마사와 함께 재기하기 위해 진행한 작전들의 개연성 없음에 주목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에 뭔가 직접적으로 뻔한 메시지를 가장 실망스러운 방식으로 전하고 있는데도, 나는 그것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되었다. 작가가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으니까. 작품에 있어서 필립처럼 잰 체하지 않겠다고 데이비드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었으니까.
작가가 애정을 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곳에 나도 애정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라는 게,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신데렐라성 이야기와 몰락, 그리고 재기. 어찌보면 뻔한 구조이기도 했는데, 나는 왜 이리 며칠 굶은 사람처럼 체면 차리지 않고 이 이야기를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운 것일까.
그리하여 생각했다. '이야기'라는 것이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이 본능적인 욕구라고. '다음 상황을 알고 싶은 욕구'는 그것이 잘만 만들어진다면 온갖 미학적인 기교 못지 않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직접적으로 독자를 자극한다. 그리고 나는 꽤 오랫동안 이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걸스럽게 식사처럼 독서를 해치운 뒤에, 나는 문득 생각을 했다. 나는 목이 말랐었구나.
'서사'라는 것을 소설의 본질로 말하기 꺼리는 입장이 있다. '서사'가 실종된 '소설'들의 실례는 얼마든지 있다. 요즘의 미학적 관점으로는 촌스러운 '서사'정도는 가볍게 날려주는 것이 미덕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서사라는 개념이 정말로 사라진 소설을 상상할 수는 없다. '서사'의 근원직인 힘을 믿는다, 는 낭만적인 낙관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을 말하는 것과 같은 개념적인 문제다. '서사'라는 개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때만, 그 반대에 '서사'가 없는 소설이 미학적 기교로서 사고되거나 존재할 수 있다. 정말 세계에 서사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오직 '소설'이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이미 '소설'이 아닐 지도 모른다.
뭐, 쓸데 없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템테이션>은 그런 의미에서 요즘 '소설'의 대척점에서 원시적인 충격을 줬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앞서 구분한 몇가지 책의 종류에는 물론 포함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종류일 것이다.
읽는 순간이 굉장히 중독적인 책.
즐거운, 이라고 적었다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중독적인 이라고 고쳤는데, 그건 아무래도 좀 더 육체적인 쾌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내용보다는 바로 그 순간의 감각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기억에 남는 음식은 사프란 섬에서 데이비드가 처음 먹는 화이트 와인과 굴. 가볍게 먹겠다는 말에 굉장히 구체적으로 추천된 메뉴. 나는 굴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얼음 위에 레몬과 함께 놓은 굴과 화이트 와인은 분명 매력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즐거웠던 장면은 역시 데이비드가 몰락한 뒤 모든 것을 잃고 서점에서 일할 무렵. 그런 종류의 구성엔 전형적인 매력이 분명 있는데,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지는 순간 오히려 마음의 모든 것이 평안해지고 머리가 맑아지기 마련이다. 물론 현실의 내가 아니라 소설속 인물이 그래야 한다는 조건.
- 더글라스 케네디는 <빅 픽쳐>로 더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룸메이트의 말로는 <템테이션>에서 주인공의 직업을 작가에서 사진기사로 바꾸면 <빅 픽쳐>가 된다고 한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댄 브라운처럼..
(이미지 출처 : http://www.kyobob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