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탈리아
여행은 언제 모험에서 생활로 바뀌는가.
출발하기 전 챙겨 넣었던 보송보송한 옷들이 점점 떨어지고,
더는 미룰 수가 없어서 어느 날 숙소의 세탁기를 빌려 밀렸던 빨래를 하고,
그렇게 낯선 곳의 햇빛에 바짝 마른,
맡아본 적 없는 세제 냄새의 양말을 바스락거리며 신을 때,
그때 나의 여행은 모험에서 생활이 된다.
생활로서의 여행은 그런 것이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며 설렘보다 어제 걸었던 다리의 피로가 먼저 느껴지는 것,
버스를 타면 창밖의 풍경보다는 유리에 비친 덥수룩한 머리의 내 모습이 먼저 들어오는 것,
거리와 건물 안에서 나던 낯선 세계의 냄새를 더 이상 맡지 못하게 되는 것,
한 번 들른 적이 있었던 음식점을 찾아가 같은 음식을 다시 먹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식사가 아니라 끼니라고 생각하는 것,
호텔의 평범하디 평범한 조식을 먹으며, 나는 문득 이것이 '끼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아무런 감동이 없는 터키식 조식 카흐발트. 처음 터키에 발을 들였을 때 그것은 마치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처럼 신선하고 찬란했었는데.
내 여행이 언제부터 생활이 되었더라. 나는 떠올려보았다. 이스탄불의 숙소에서 카운터를 보던 남자에게 거의 다 떨어져 가는 세제통을 받아서 세탁기 앞에 섰을 때였던가. 아니면 6개월 동안 터키의 공사장에서 일하던 나날들 중 언젠가였나. 어쩌면 여행객이 아니라 출근길의 터키인들과 한데 섞여 탔던, 탁심으로 향하던 트램 안에서였을지도 모르지. 우산도 없이 점퍼에 묻은 비를 털어내며 옆자리에 앉은 그들 사이에서, 나는 이곳이 여행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 한가운데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주민도, 여행객도 아닌 그 사이 애매한 감성을 가지고, 여행과 일상의 어느 틈바구니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나만의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 끼니를 먹고, 트램을 타고 내려서, 어디론가 하염없이 걸어 다니는. 그렇게 누구와도 말을 섞는 일 없이 회색 포장도로 위를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걷고 있나.
나는 모험을 원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낯설고, 코로 들어오는 공기마다 새롭고, 입에 넣는 것마다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모험. 생활이 내 여행을 완전히 장악해버리기 전에, 나는 어느샌가 잃어버렸던 모험을 다시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숙소를 나서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늦은 아침의 거리는 아포칼립스 소설의 도입부처럼 적막했다. 전기가 여전히 흐르고 있을까 싶은 전깃줄과, 햇빛과 사물과 그림자만 존재하는 도로.
나는 생존자 구역을 뒤늦게 찾아가는 주인공처럼, 도로의 소실점을 향해 막연히 걸었다. 저 소실점의 끝에서 떠들썩한 사람들의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좀비들을 피해 마침내 안식처를 찾은 사람들의, 안도감에 취해 다소 부주의하게 내뱉는 환호성.
목적지로 삼은 곳은 구시가지 서쪽에 있는 콘얄트 해변이었다. 해변에는 어쨌든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비록 전면적인 외출 금지령이 내렸다고는 해도, 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해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코로나와 관계 없이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경찰. 사자와 얼룩말이 함께 호수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아프리카의 사진처럼, 경찰과 여행자들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기라도 하듯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해변에서 공존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안고 얼마나 걸었을까.
꽃과 풀냄새가 물씬 나는 언덕을 올랐더니 갑자기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소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봄바람에 이마의 땀을 식히며 나는 마침내 마주한 콘얄트 해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끝도 없이 길게 뻗은 푸르스름한 자갈 해변과, 먼 곳에 첩첩산중으로 펼쳐지는 산맥들의 모습. 나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지금부터 저 긴 해변이 끝나고 가장 가까운 산이 시작되는 저 끝까지, 자근자근 자갈을 밟으며 걸어갈 것이다. 중간에 돌아오는 일 없이 정말로 끝까지. 그러면 그 긴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떤 사소한 일들을 겪게 될 것인지. 그런 기대감이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그래. 이것이 모험이었다.
해변으로 내려온 나는 출발점의 풍경을 잠시 뒤돌아보았다. 해변이 시작되는 곳의 모습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바위와, 어딘지 다른 곳보다 차가워보이는 물의 색, 그리고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하는 용기 있는 피서객 한둘의 모습.
지금껏 내 주변에서 바다에 왔을 때 이런 장소를 선택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어느 해변을 가도 굳이 이런 곳에 자리를 잡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 적도 없었다. 해변의 끝이 취향인 사람들. 그들은 정말로 해변 중앙까지는 가지 않은 채 이곳에서 여행을 끝내는 것일까.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돌 위로 올라왔다가 하면서.
바위 사이 몸을 누일 아늑한 공간과, 용기 있는 다이빙을 지켜봐 줄 친구가 있다면 그것 또한 나름대로 즐거운 피서의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그들과 동선이 달랐다. 나는 더위를 피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기 위해 이곳에 왔다. 때문에 그들이 바다와 바위를 오가며 수직으로 움직이는 동안 나는 해변을 따라 길게 수평으로 움직일 것이다. 아마도 오늘 이 해변에서 그런 움직임을 가진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을 것이다. 심호흡도 없이, 나는 뒤를 돌아 출발했다.
출발지에서 몇 걸음 걷자마자, 나는 이 모험이 쉽지 않겠다는 것을 느꼈다. 오직 자갈로만 이루어진 이 해변은 모래보다 걷기가 훨씬 힘들었다. 푹신하기는 해도 일정하게 발이 빠지는 모래 해변과 달리 이곳에서는 자갈의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발이 빠지는 정도가 시시각각 달랐다. 체중을 얼마나 실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걸음걸음마다 타격을 받는 것은 내 무릎이었다. 여행 동안 거의 달고 살았던 발가락의 물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고통들은 한 걸음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찾아왔으므로, 전철의 레일소리처럼 나는 그것들을 금방 잊어버리게 되었다.
자갈이 가득한 해변을 걸으며 나는 H씨와 함께 사는 거북이를 생각했다. 그 거북이가 사는 수조에 지중해의 햇빛을 듬뿍 받고 세월을 보낸 돌이 하나 들어있으면 어떨까, 하고. 그건 꽤 괜찮은 선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길고 긴 자갈 해변을 걷는 동안, 거북이를 위한 돌을 하나 찾아보기로 했다. 조건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 돌을 보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돌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손에 후보가 될 돌들을 주렁주렁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몇 개의 돌을 지나치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지나갈 길에서 그보다 더 나은 돌을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백화점의 윈도우 쇼핑과는 달리 이 넓은 자갈해변에서 내가 점찍어두었던 돌을 돌아오는 길에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내가 가는 길은 오직 일방향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돌을 보는 순간, 그 돌이 거북이의 수조에 들어갈 만한 완벽한 돌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고, 그리고 그것을 주워 들면 그것을 선택해야 했다. 물론 그 선택한 돌보다 더 나아 보이는 돌을 발견하면 가지고 있던 돌을 버리고 그걸 주울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낙관하고 있었다. 해변의 끝까지 걷는 동안, 나는 그 돌을 분명 어렵지 않게 한 번에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 돌은 다른 어떤 돌보다 그 거북이에게 잘 어울릴 것이기 때문에, 다른 돌은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걷다가 문득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그 무언가에 대한 노골적인 은유라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도로 다른 일일까. 해변을 걸으며 거북이에게 어울리는 돌을 찾는 것과, 결혼 상대를 찾는 것은.
바닥을 보며 하염없이 해변을 걷다가 지쳐 걸음을 잠시 멈췄다. 뜨거워진 발을 바닷물에 담금질해서 식힌 뒤, 양말을 다시 신을 수 있을 정도로 마를 때까지 자갈 위에 벌렁 누워 햇볕을 쬈다.
손깍지를 뒤통수에 대고 발밑으로 보이는 바다와 하늘을 보며, 나는 얼마 전까지의 나를 떠올렸다. 바다 위 300미터에서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기계들 사이에서 버튼을 누르며 비바람을 조금이라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던 그때의 나를. 아홉 시 열 시가 다 되어 숙소로 들어와 기절하듯 잠을 자다가, 문득 눈을 떴을 때 암막 커튼 사이로 미약하게 들어오는 푸른 새벽빛에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던 나날들.
나는 햇볕에 달궈진 자갈이 등에 전달해주는 온기를 느꼈다. 이곳은 그곳과 전혀 다른 곳이었다. 차갑고, 짧고, 무거웠던 그 모든 시간들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 있었다.
나는 지금 꿈의 한가운데 있었다.
누구나 일상 중에 커피를 들고 사무실 창문을 보며 한 번쯤 문득 생각하는 것처럼, 나 또한 공사장에서 작업이 없어 한가해진 시간에 조용해진 무전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보며 꿨던 꿈. 언젠가 지중해의 해변에서 햇볕을 받으며 벌렁 누워만 있고 싶다, 라는 그런 꿈. 과거의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고 열망했던 것이 지금의 나였다. 어떤 시간에도 얽매이지 않고, 원한다면 몇 발자국 걸어가 이국적인 음식을 맘껏 사먹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의 나.
그러나 이런 꿈 같은 공간에서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과거의 일들이다. 나는 꽤나 오래전 블로그를 처음 만들며 적었던 첫 글을 기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이어졌던 어떤 낙오감과 비슷한 몽롱한 현실감각에 대한 것이었다. 상식을 잘 간직한 사람들이 탄 기차는 저만치 떠나버리고, 조용해진 철로를 따라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런 감정에 대해 적은, 오래된 글이었다.
집을 산 친구들과 아이를 키우는 후배들. 먼저 출발했던 그 기차는 이제 얼마나 먼 역을 지나쳐가고 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자갈로 가득한 이상한 철로를 걷고 있다. 그때는 이것이 일종의 모험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러한 길을 걸으면 나 또한 나만의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어쩌면 이제 생활이 되어버린 모험을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인가.
등에 닿은 따뜻한 자갈 때문에 서서히 땀이 나기 시작하려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식이 순식간에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그래.
거북이에게 어울릴 만한 돌을 찾아 자갈 해변을 끝까지 걸어가기로 했었지.
그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해변의 중반쯤, 갈증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나는 잠시 도로로 올라왔다. 숙소에서 출발하면서부터 아껴온 갈증이었다. 바싹 마른 입안과 구겨진 종이 같은 혀. 그것들을 잘 간직한 채 문이 열려 있는 카페를 찾았다.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빈 카페엔 사람 대신 바닷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주인마저 이곳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인기척이 없던 뒤편의 공간에서 카운터 앞으로 한 사람이 슬쩍 나왔다. 꿈속을 헤매다 이제 막 현실로 돌아온 듯한 나른한 말투로, 그녀는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했다.
Portakal, suyu.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과일을 꺼내 착즙기에 넣고 짓이기는 동안, 나는 '포르타칼'이라는 터키어 단어가 '오렌지'라는 말보다 더 상큼한 어감을 가지고 있는지 혼자서 몇 번이나 발음해보았다. 포르타칼. 포르타칼. 낯선 단어지만 어쩐지 침이 고이는 단어. 이 사람들은 오렌지를 평생 동안 포르타칼이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마시게 될 것도 오렌지 주스가 아니라, 포르타칼 수유라는 미지의 음료수가 될 것이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해 서너 개의 '포르타칼'을 아낌없이 짓이겨 만든 주스를 받아들고, 어쩐지 죄책감이 들 정도의 돈을 그녀에게 건넸다. 단단한 종이컵 안에서 순도 100%의 과즙이 호박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걸으며, 나는 단숨에 절반 정도 되는 양을 벌컥벌컥 삼켜버렸다. 미지근한 온도에도 불구하고 숨겨지지 않는 상큼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 비어 있는 위장을 짜릿하게 자극했다. 예민하게 말라버린 내 몸에 물도 아니고 신선한 과즙이 들어오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는 것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물 안에서 숨을 참았다가 마침내 파아, 하고 내쉬는 것처럼,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남은 절반을 아껴가며 마시다가 빈 컵이 될 때 즈음에 마침 쓰레기통이 눈앞에 나타났다. 빈 컵을 버리고 나자 나는 또다시 팔랑팔랑, 빈손이 되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생기가 내 몸 가득 차올라 있었다.
생기가 돌자 찾아온 것은 잊고 있었던 허기였다. 도로로 올라온 김에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구글 지도를 보고 찾아간 생선구이 가게는 굉장히 가정적이고 푸근한 인상이었다. 내부는 푸른 빛의 아기자기한 색감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것은 어느 귀여운 어른의 취향인 것 같아 보였는데, 마침 빈 식탁에 그 취향의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용한 오후에 찾아온 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아요.
내가 응당 있어야 할 미래를 빼앗긴 기분으로, 나는 가게를 나섰다. 그런 푸른색 가게에 앉아 안탈리아의 신선한 해산물을 마음껏 먹는 그런 미래. 올리브유로 익힌 조개와 짭짤한 생선. 부드러운 문어 같은 것들. 그것들은 저 테이블 위에 거꾸로 올라간 의자들 대신 올라가 있어야 했는데.
그곳을 떠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간신히 발견한 곳은 탄투니를 파는 큰 규모의 전문점이었다. 크고 얇은 빵인 라바쉬에 잘게 썰어 익힌 고기와 야채들을 섞어 말아서 만드는 요리인 탄투니는 식사라기보다 간식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나는 그것으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음식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와 한적한(물론 지금은 주변의 모든 곳이 한적했다) 벤치를 찾아 식사를 했다. 그저 고픈 배를 잠시 속일 수 있을 정도의 맛이었다. 아까의 오렌지 주스를 잊지 못해 추가로 구입한 오렌지맛 환타는 특별할 것 없는 탄산음료의 맛이었다. 마법은 이미 풀려 있었다.
다시 해변으로 내려와 한참을 걸었다. 물안개 너머로 그토록 멀리 보이던 산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해변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갈밭을 걸어 콘얄트 해변을 횡단하겠다는 내 목표는 끝을 앞에 두고 난관에 부딪혔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이 있어서 자갈밭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물 너머 건너편까지는 대략 열 걸음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양말과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물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물은 생각보다 깊어 보여서 걸어서 그냥 건넌다면 허벅지까지는 물에 닿게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도움닫기를 해서 뛰어 건널 수도 없을 정도의 폭이었다. 아무리 멀리 뛴다고 해도 몇 걸음 정도는 물속을 헤치고 걸어야 했다.
맨발을 드러낸 채로 자리에 앉아, 나는 그 애매하게 넓고 깊은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신발을 들고 휘적휘적 물을 건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무릎 위로 올라가지 않는 청바지 덕분에 허벅지까지는 분명히 젖어버린다. 어쩌면 생각보다 강한 물살에 발을 헛디뎌 몸 전체가 젖게 될 수도 있겠지.
나는 이미 물 건너편에 도달한, 조금 후의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물을 털어낸 뒤 마른 양말로 대충 발에 남은 물기를 닦고, 축축한 바지를 그냥 햇빛과 바람에 말리며 추척추적 자갈밭을 걷기 시작하는 내 모습을. 바지를 젖어가며 이렇게 건넌 것이 뭔가 의미가 있을까, 어쨌든 어떤 난관에도 목적을 이룬 것이니 만족할만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내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저 물을 건너는 것은, 그저 앞서 머릿속으로 상상한 '어떤 미래의 나'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에 불과했다. 상상했던 그대로의 행동을 하고, 그로 인해 찾아올 예상 가능한 만족감을 예상한 그대로 느끼는 것. 그런 것을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상상해본 적 없는 새로운 미래를 선택했다. 자갈 해변을 벗어나 도로로 올라가, 작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해변이 시작되던 곳의 풍경과 확연히 다른 동네였다. 공기 중에는 바다의 소금기가 아니라, 산에서 내려온 것 같은 신선한 안개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작은 동산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산맥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내려다본 강물은 초록빛이었다.
이곳은 분명 내 예상에 없었던 공간이었다.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 발걸음은 그런 식으로 향해야 했다. 오늘은 모험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자갈해변으로 다시 내려가는 길은 제법 걷고 나서야 나왔다. 해변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자갈을 달구던 햇볕의 뜨거운 느낌이 가시고, 어쩐지 점점 서늘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무렵, 나는 콘얄트 해변의 반대쪽 끝에 도착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방파제와, 어떤 시설이었다. 아마도 군사시설처럼 보이는 건물은 살벌한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입구에는 단호한 폰트의 출입 금지 표시가 있었다. 그라데이션을 그리며 점점 모래로 변해가던 자갈해변은 직선으로 뻗은 시멘트벽에 막혀 덜컥, 끝나 있었다.
그건 뭐랄까, 어떤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콧수염 나고 멜빵을 한 젊은 남자와 펌을 한 긴 금발머리에 푸른색 원피스의 여자가 맨발로 이국의 해변을 걸으며 사랑의 도피를 하던 낭만적인 이야기가, 마지막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 불쑥 등장한 정체불명의 언어를 쓰는 군인들의 오인사격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그런 영화를.
나는 몸을 돌려, 내가 여태껏 걸어왔던 해변을 돌아보았다.
그 풍경은 내가 실제로 지나왔던 그 공간들이라기보다, 그냥 나와 상관없는 한 장의 그림인 것 같았다. 여운이 남는 이야기의 장편소설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새삼 다시 보게 되는, 두툼하고 낯선 책이라는 네모난 사물처럼.
아득히 먼 곳에 수평선과 섞여 보이는 안탈리아의 구시가지는 거의 구름이나 신기루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점이 기뻤다. 나는 바로 그곳에서 왔다. 여기까지. 내 발로 뚜벅뚜벅 걸어서. 하늘이 넓게 보였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무언가가의 끝이라고 하기에 알맞은, 그런 곳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택시를 탔다. 차 하나 없는 도로의 한쪽에 노란색의 택시가 현실세계로 나를 데려다 줄 상상친구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노란색의 택시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출발지였던 안탈리아의 구시가지로 나를 데려다줬다. 몇 시간을 걸었던 길을 돌아가는 데는 십수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모험이 아닌 세계가 가진 원래의 속도였다. 어딘가에 앉아 잠시 기다리면, 머지않아 나를 둘러싼 풍경이 저절로 바뀌어 있는 세계. 생활을 위해, 모험이 사라진 세계.
신기하게도 다시 돌아온 세계에서의 시간은 무척 빨리 흘러갔다. 자갈밭을 하루 종일 걸어 다닐 때는 머리 위에서 미동도 없던 태양이, 숙소로 돌아와 별것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산 너머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하루종일 에너지를 많이 썼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숙소를 나섰다. 초저녁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샤워를 마친 몸에는 기분 좋은 노곤함이 퍼져 있었다.
구시가지를 걸어 다니며 근방에서 가장 전망이 좋아 보이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절벽 위에 지어진 레스토랑이었다. 그런 곳이라면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을 것 같았고, 운이 좋다면 식당 안에서 음식을 먹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레스토랑 내부로 들어가니 종업원은 있었지만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나는 카운터를 보는 종업원에게 불안한 마음으로, 혹시 식사가 가능한지 물었다. 물어보면서도 반쯤은 포기를 한 상태였다. 그는 내 걱정과 달리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아래 해변에서 식사를 해야 합니다.
그는 묘한 말을 덧붙이며 바로 옆의 문을 가리켰다. 문 너머에는 절벽을 따라 내려가는 계단이 길게 나있었다. 계단의 끝에는 이 식당 소유로 보이는 작은 해변이 있었다. 여태까지 들렀던 다른 식당들과 마찬가지로, 해가 떨어지기 전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라마단 기간의 단속 때문인 것 같았다. 식당의 불 꺼진 2층, 주차장이 보이는 뒤뜰. 그런 곳에 비하면 비밀 해변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나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하나 주문해놓고 계단을 따라 해변으로 내려갔다. 어딘지 낯이 익은 느낌이 드는 해변이었다.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찾아오는 기시감이라고 생각을 했다.
해변에 놓인 여러 개의 벤치 중 적당한 것을 하나 잡고 앉아 작은 해변의 모습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반나절을 걸어 끝에서 끝까지 도착했던 콘얄트 해변에 비하면, 이곳은 그저 벤치에 앉아 고개를 좌우로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도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비키니를 입은 할머니와 간이 샤워장에서 몸을 씻으며 웃는 아이들. 산과 가까워지며 점점 짙어지는 햇빛. 그런 것들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다.
가게 앞 호객꾼이 자랑스럽게 보여주던 커다랗고 잘생긴 생선과, 빛나는 비늘. 7년 전의 터키 여행에서였다. 레스토랑에 딸린 이 해변의 존재를 알고 찾아왔는지, 아니면 식사를 마치고 해변도 이용할 수 있다고 슬쩍 귀해준 웨이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해변으로 내려왔었다.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로 특징적인 곳이었는데, 이 해변은.
기억나는 것은 물에 들어가 놀고 있는 M과, 그것을 반대쪽 방파제 위에서 내려보고 있던 외국인들의 실루엣이었다. 해변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일정에 없었으므로, 지중해에 몸을 담글 수 있는 기회는 이 작은 해변에서뿐이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물 밖에서,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면서.
모래 해변과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복장을 한 웨이터가 다가와 간이의자 위에 내가 주문한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뭔가 초현실적인 풍경 같았다.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고, 직사광선을 받아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포르타칼' 수유를 마셨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두 명이 여행을 왔다면 틀림없이 이번 여행은 실패의 연속처럼 느껴졌을 거라고. 코로나와 라마단으로 인해 기껏 찾아간 맛집은 문을 닫고, 차가 없어서 해변까지 두 발로 걸어 다니고, 길바닥에 앉아 음식을 먹고, 문을 닫은 미술관 대신 아무것도 아닌 골목을 구경하고.
그러나 혼자인 여행에서는, 실패한 생활이 모두 모험이었다. 문을 연 다른 맛집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었고, 사용 가능한 교통편을 수소문하려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다. 변덕에 따라 발이 닿는 순간순간, 그곳이 새로운 목적지가 되었다.
스파게티 한 그릇으로는 배가 차지 않았기 때문에, 숙소로 들어가기 전 패스트 푸드처럼 케밥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고기를 끼운 되네르 기계가 아직 돌아가고 있었다. 거의 다 깎여나가 얼마 남지 않은 고깃덩이가 마감 시간이 다가왔음을 짐작하게 했다.
터키인처럼은 보이지 않는 금발 머리의 중년 여자가 나보다 앞서 주문을 했다. 현지인이라기엔 이방인처럼 보였지만, 여행객이라기엔 어딘지 노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뭔가 잔뜩 담긴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있는 그녀는 메뉴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처럼 자연스럽게 주민들과 섞여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주문할지 궁금했다. 깊어가는 저녁, 마감을 앞둔 가게에서, 도대체 어떤 메뉴를 골라야 적절한 선택처럼 보일까.
그녀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렌틸콩 수프와 물 두 병. 나는 그녀의 주문이 무척이나 근사하게 느껴졌다. 저 수많은 고기 메뉴들 중에서, 정말로 현지인처럼 느껴지는 렌틸콩 수프라니. 이미 저 고기 요리들이 무슨 맛인지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주문이었다.
그녀의 주문이 근사했던 것과는 별개로, 내 선택은 햄버거처럼 생긴 빵에 되네르에서 긁어낸 고기가 든 케밥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나는 아직 초짜 여행객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이곳을 대표할 것 같은 메뉴를 지나칠 수는 없었다.
포장되어 나온 케밥을 받고 근처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그것을 먹어보았다. 갓 만들어졌음에도 빵은 공갈빵의 그것처럼 딱딱했고, 고기 역시 지나치게 익혀버린 베이컨처럼 딱딱했다. 별다른 소스도 없었기 때문에 딱딱한 고기에 맺혀 있는 느끼한 기름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선택이 현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에는 그녀가 용기에 포장해서 가지고 갔던 노란색의 렌틸콩 수프가 아른거렸다.
내키지 않는 간식을 먹고 있던 사이, 내 근처로 공원의 고양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는 넘어 보일 정도로 수가 많아서 어딘지 공포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들은 내게 케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도 괜찮은 거래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케밥의 고기 부분을 빼서 알록달록한 고양이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차례로 던져주었다. 고양이들이 먹을 것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나는 남은 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마침내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몸을 굉장히 혹사시켰던 하루였다. 불 꺼진 방 침대 위에 엎드려 노트북으로 버스표를 검색해보았다. 내일은 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출국 비행기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리를 한다면 중간에 다른 도시를 하나 더 들를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스탄불로 조금 일찍 들어가 있기로 했다. 부랴부랴 볼거리를 찾아 뛰어다니며 의미를 만드는 것보다, 좀 더 무의미한 공간을 걸어 다니고 싶었다.
만약 이스탄불에 돌아간다면, 그것은 모험이 될까. 아니면 같은 식당을 두 번 찾아가 먹는 '끼니'처럼 생활이 되어버릴까. 이스탄불이 내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했다.
나머지 하나는 렌틸콩 수프를 먹는 것이었다. 머릿속에는 아까의 가게에서 여자가 주문했던 그 노란 렌틸콩 수프가 떠나질 않았다. 가장 터키 현지인 다운, 노련한 음식. 이번엔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맛있는 렌틸콩 수프를 찾아 먹을 것이다. 그런 다짐이었다.
잠들기 전 나는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 두었던 돌을 바라보았다. 숙소로 가져와 씻었던 돌은 그새 잘 말라 있었다. 해변의 중간보다 조금 더 간 어디에선가, 나는 그 돌을 발견해 주워들었다. 이후로 그것보다 더 나은 돌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더 나은 돌은 보지 않기로 생각해버렸던 건지도 몰랐다. 그것에 올라가 일광욕을 하는 거북이를 상상하면서, 그 돌을 거북이가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둥글고, 넓적하고, 기분 좋은 무게감으로 묵직한,
무늬 없이 하얀 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