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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9. 2018

[영화] 컨택트

'101%가 될 수 없는 훌륭한 노력에 대하여'

Arrival 2016 - 드니 빌뇌브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먼저 봤다. 먼저 본 것을 더 좋게 생각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보았고, 그것을 스스로 의식하며 감안한다 해도 나는 소설이 좋았다. 장르적 우수성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목적이 원작의 '재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근접하게 다가간다 할지라도 100%에 닿을 수 없다. '각색'이란 것은 '재현'의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역설적으로 원작을 능가할 수 있다. 


<컨택트>는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원작이 가진 중요한 힘과 감동이 어디서 오는 지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영화라는 작품으로 옮기면서 생기는 장애들을 오히려 영화적인 장점으로 만들어서 재현해냈다. 가령 가시적인 헵타포드 언어 같은 것들. 매끈하고 인상적인 우주선(?)과, 현실감 넘치는 현장의 연구소. 굳이 주름살을 새로 그려넣지 않더라도 어느 시간대든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인 에이미 아담스가 루이스 역할을 맡은 것도 훌륭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추억을 보여준 다음 외계인의 출현을 이어진 시간대에 연결하며, 마치 아이를 잃은 그녀가 쓸쓸하게 강의를 하는 생활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소설이 활자로써 쉽게 행할 수 있었던 그 속임수)'현상을 특별히 눈에 띄는 분장 하나 없이도 자연스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별개로 왠지 종국에 스파이인 것을 드러내며 활을 쏠 것 같은 제레미 레너의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인가). 


영화는 소설과 정확히 똑같은 포인트에서 끝났다. "아이를 만들고 싶어?"라는 질문과, 모든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미소를 짓고 "응."이라고 대답하는 것. 모든 서사적 소용돌이와 갈등(심지어 전쟁과 우주인의 출현조차도)이 바로 그 지점으로 빨려들어간다는 것을 영화는 잘 알고 있었고, 바로 거기서 영화 역시 끝났다. 아마도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은 아이의 아버지가 이안(제레미 레너)이라는 것이었고, 때문에 철저하게 아버지가 등장하는 모습을 숨겼다(때문에 한나와 루이스의 추억에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과 달리.). 원작 소설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뼈대를 거의 그대로 살리면서, 영화 나름대로의 시각적 즐거움도 만들어 냈다.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결국 닿지 못한 100%에 대한 아쉬움 또한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비선형적 언어관인 헵타포드 B를 이미 습득하고 그것에 기초한 구조적 말하기로 서사를 진행시켜 나갔던 소설의 화자인 루이스와 달리, 영화의 루이스는 단순한 예지능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본인 외엔 아무도 모르는 아내의 유언을 섕 장군에게 전화로 말함으로써 발발할뻔 했던 전쟁을 막는 순간은, 그동안 너무나 익숙했던 헐리우드 영화의 영웅서사가 별안간 침입한 것처럼 느껴졌다. 


'무기'라는 단어 하나에 흥분하여 연구를 즉시 중단하고 군대를 전진배치하여 아직 확인되지 않은 미지의 생물들에게 호전적인 도발을 하다가, 아내의 유언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공격적 태도를 중지하고 드레스와 정장, 와인잔을 부딪히는 나긋나긋한 평화적 무드로 변환하는 이 세계관의 군대(미국, 혹은 세계)들은 또 어떤가. 이들의 유치하다고 할 수 있는 단순함이 단지 필요불가결한 영화적 긴장감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된 것인가(그로 인해,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원작 소설의 헵타포드들과는 달리, 이 세계의 햅타포드는 마치 전쟁을 피해 사라진 것처럼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한나'는 어떨까. 영화의 한나는 소설의 '너'처럼 발칙하지도, 사랑스럽지도, 그리하여 슬프지고 안타깝지도 않다. 한나는 오로지 비쥬얼적 요소로 등장한다. 어리고 귀여운 외모와 햇빛이 감도는 추억어린 배경. 엄마를 끌어 안고 코를 비비는 것 같은 그 제스쳐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 장면은 종종 루이스의 서사에 그림엽서처럼 끼어들곤 한다. 단지 '그림엽서'처럼. 그것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너무나 익숙한 그 '장면'으로만 표현해냈다는 것. 마치 '사랑'이란 말을 뜻하는 상형문자처럼 아이와의 추억이 끼어들었다. 아마도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소설에 등장했던 두 사람의 농담따먹기나 쇼핑 에피소드, 샐러드볼 에피소드 따위가 끼어들면 안그래도 잔잔하게 진행되고 있는 외계인과의 중심 서사를 쓸데없이 해칠 테니까. 아이 아버지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면(시각적인 것을 배제하고 등장시킬 수는 없었을 것), 마침내 아이의 아버지가 사실은 함께 연구한 이안이라는 결정적인 사실이 맥없이 드러나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때문에 나는 '재현'이라는 목적이 가진 한계를 여실히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0%의 작품을 읽은 내가 90%, 혹은 아무리 잘 쳐줘도 99%의 작품을 또다시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99%까지 끌어올린 그 노력과 가상함에 박수를 쳐야할 것인가? 그것은 같은 소설을 두 번 읽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컨택트>를 보며 나는 매 순간 그 '재현'의 목적이 지금이라도 파괴되기를 원했다. 이안의 아버지가 미리 모습을 드러냈으면 어땠을까. 아이와의 추억이 엽서처럼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평행세계처럼 독립적인 서사를 가지고 진행되었으면 어땠을까. 그로 인해 어느 쪽이 지금 현재 흐르는 시간인지 관객들을 헷갈리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리하여 아이가 죽는 모습이 나중에 등장한다 할지라도, 그 행복한 세계의 침몰이 최후에, 아이를 가지고 싶냐는 질문의 바로 앞에서야 등장하고, 그렇다고 말하는 그 대답이 훨씬 슬플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들이 들었다. 101%가 될 수 없는 훌륭한 노력에 대하여. 얼마나 충실하게 잘 만들었는지 한번 봐야지, 라는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원작을 침해했다는 사실이 하나라도 보이면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반드시 원작이 침해되기를, 비틀리기를, 때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산산히 부서지기를 차라리 바라는 쪽이다. 


물론 이게 다 내가 영화보다 소설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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