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죄목'
아담의 죄목
블랙. 크리스가 여자친구의 집에 아무런 언질 없이 가도 되겠느냐고 말하며 조금 망설이다가 뱉은 단어(그러니까.. 남자친구가 블랙, 이라면). 스스로의 어떤 것을 지칭할 때조차도 망설이게 되는 단어. 지칭 만으로도 그것이 일종의 차별이 될 수도 있는 단어.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는, 그저 현상적인 특징을 지칭할 뿐인데, 어떻게 그것조차 편견이 될 수 있냐고.
그러나 흑인(그렇다, 이 단어)들에게 있어서 그것(피부가 '까맣다'는 것)은 '현상'은 아닐 것이다. 동양인인 내가 어느 날 거울이나 내 손을 보고 스스로 '노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블랙'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그것을 타자로서, 현상으로서 바라보고 있는 어떤 주체를 전제로 한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대상보다 상대적으로 하얀 것을.
타자. 우리는 타자를 접할 때 누구나 스스로 아담이 된다. 내가 아닌 무엇을 인식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나와는 다른 차이에 주목하고, 그리고 마침내 이름을 지어 붙인다. 이름이라는 폭력. 누구나 스스로 폭력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겠지만, 그러나 타인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런 '가해'의 순간을 피할 방법이 없다. 다름의 인식은 반드시 대상화의 과정을 거치고, 거기서 일어나는 명명(命名)의 욕구를 거스를 수 없다.
이 필연적인 폭력을 윤리의 이름으로 치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우리 시대(라기보다 어쨌든 이 분야에서 선진적인 미국이라는 나라)가 도달한 논의는 어떤 윤리적인 감수성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한 감수성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은 성립 가능한 윤리인가? 아무리 고민하고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대상을 '어떻게' 부를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지 '대상'을, 이라든지 '부를까'의 문제를 건드릴 수는 없는 것인데, 이미 '대상을 부른다'는 그 폭력은 원초적으로 인간이, 혹은 생물이 벗어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 그런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에서 평등하다. 모두가 벗어날 수 없고, 모두가 동등한 입장의 가해자라면, 그 순간 폭력의 개념은 성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부르고, 너도 나를 부른다. 그것이 벗어날 수 없고, 또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이라고 서로 합의한다면, 우리는 윤리적 갈등 없이도 얼마든지 서로를 맘껏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평등해보이는 저울에 한 가지 변수가 끼어든다. 그것은 역사다. 노예제와 억압의 역사가 이 평등할 수도 있었던 호명의 관계를 오염시켰다. 역사에 의해 오염된 관계는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는 것도, 혹시나 인종적으로 실례가 되지 않을까 조심하는 행위조차도, 모두 여전히 상대가 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구분되어야 할 무언가로 생각되게 만들었다. 상대가 흑인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자연스러운 대화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를 뻣뻣한 연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가족들의 파티에 참석한 흑인 크리스를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은 왜 하필이면 스포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골프를 치던 사람이 타이거 우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왜 하필 타이거 우즈인가. 그렇다면 크리스의 앞에서 타이거 우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는가? 그러나 크리스가 아니었다면, 여기서 타이거 우즈가 언급되는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어떤 인종이 객관적으로 지닌 것만 같은 육체적 이점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다른 사람의 직장의 일이나 가족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을까?
한번 오염된 관계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아마도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나서 그 역사에 이입할 수 없을 정도로 인식이 흐려진 이후에, 그 누구도 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이후에야 그들이 서로를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이(조심을 하든 조심을 하지 않든 어느 경우나) 가능할 것인가?
긴장감
<겟 아웃>이라는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긴장으로 가득 차있다. 그 긴장이란 단지 뭔가를 숨기고 있는 수상한 가족들과 그곳에 초청받은 한 사람이라는 서스펜스한 플롯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실례가 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인종적 감수성을 약간이라도 접한 관객들이(아마도 거기에 익숙한 미국인들이) 보기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그 긴장감은 분명히, 흑인인 크리스가 수많은 백인들(그것도 팔이 안으로 굽는 그 가족들) 사이에서 말을 섞을 때 일어나는 그런 종류의 긴장이다. 언제 위험한 발언이 불쑥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 위험한 발언이 슬쩍 넘어가버릴 때 크리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로즈의 반응은?
그런 긴장감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와중에, 감독이 조던 필레라는 것이 유일하게 안도감을 주는 사실이다. 인터넷을 떠도는 유머글 사이에서 그의 얼굴을 종종 봐왔다. 스스로가 흑인이라서 할 수 있는 유쾌한(?) 농담들. 묘하게 덕후성을 지니고 있는 코미디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그가 코미디가 아닌 영화를 만들었고, 또 반응이 좋다는 데 호기심이 생겨 애초에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니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흑인 뿐. 그런 정서에서 본다면 이 인종적 긴장감으로 팽팽한 영화의 감독이 그이기 때문에 인물들의 대화든, 영화의 시선이든 걱정하지 않은 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쓸데 없는 걱정 없이.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
일상을 보내는 그들이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다. 평범한 대화 속에서 긴장감을 느낀다. 그것은 단순한 영화적 긴장감이 아니다. 흑인으로서, 그러니까 선의든 악의든 어떤 의도의 대상으로서 백인들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의 긴장감이다. 예민한 개인이 혼자만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긴장감은 아니냐고? 사진작가인 크리스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카메라를 기억하자. 파티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서로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문득 자신을 겨누고 있는 카메라를 의식했을 대 보이던 그 '놀람'을.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눈앞에 카메라가 놓이면 결코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는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화를 내거나, 누군가는 카메라를 벗어나려 빠른 걸음을 걸을 것이다. 그것은 유달리 초상권에 민간함 사람의 행동도 아니고, 단지 수줍음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본능이다. 대상으로 포착되지 않으려는. 그런 카메라가 '파티' 같이 금방 끝나는 한 순간이 아니라, 삶 전체에 걸쳐 지독하게 따라다닌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찍힌 그 사진이 무엇에 쓰일 지 모를 경매에 부쳐진다면? 이것은 그들이 겪고 있는 세계의 은유다.
<겟 아웃>은 기본적으로 '우리도 같은 인간이다', 혹은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백인과 흑인은 확실하게 다른 사람들이다. 말투, 걸음걸이, 옷차림은 물론이고 인사법, 프렌드십, 세계를 보는 시선 등 많은 것들이 다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생각난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던 로즈를 제압하고 목을 조르고 있던 크리스가 마침내 도착한 경찰차를 보았을 때, 어째서 그의 얼굴에 마침내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났다는 자포자기의 감정이 드리워졌던 것일까. 그 사소한 순간에 나는 감독이 영화 속에 명백하게 그어 놓은 선을 분명하게 보았다. 이것은 '그들'의 세계다. 최후의 순간에 법체계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상식적인 안도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피부색 하나로 언제든 범죄자로 의심받고 정당한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 속에 살아가는 흑인, 그들의 이야기이다. <겟 아웃>에는 서로 다른 세계의 화해나, 공존 같은 메시지 따윈 없다. 그저 자신들이 지금 어떤 세계를, 어떤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담담한(?) 묘사 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