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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8. 2018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진심이라는 파도, 굴러다니는 조개껍데기'

ジョゼと虎と魚たち 2003 - 이누도 잇신

 


'질감'이라는 개념은 내게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영화에 있어서 질감이란 개념은 주로 인물이(혹은 영화가) 사물을 다루는 방식(배경에 반응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라면을 먹기 전 젓가락을 어떻게 뜯는가? 라든지, 대리석 바닥을 걸을 때나 카펫이 깔린 바닥을 걸을 때 구두를 신었는가? 혹은 냉장고 문을 닫을 때 엉덩이를 사용하는지, 그 냉장고 문은 덜컹거리며 다시 열리지는 않는지, 닫힌 냉장고 위로 햇빛은 들어오는지. 


감각을 다양하게 자극하는 방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 오감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처럼 긴장을 풀고 느슨해진다(혹은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잔뜩 긴장하게 된다). 대체로 영화의 첫 장면들은 그런 기대에 부합한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나? 빗물을 닦아내는 자동차의 와이퍼 소리가 들리나? 전화벨 소리는? 그것은 그 영화의 첫인상이고, 모든 신(scene)을 물리적으로 구성해내야 하는 영화에서도 가장 신경써서 만드는 장면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멋진 첫인상을 가지고 있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사진과 나레이션, 그것들은 사실 일본의 영상물에선 아주 흔한 기법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독백이 가장 가깝고, <언어의 정원>의 시작도, <카모메 식당>의 시작도 비슷하다. 소설적 영화와 나레이션을 사랑하는 일본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바둑돌같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마작패들을 헝겊으로 반질반질 윤기나게 닦는 츠네오의 모습을, 감독은 이 영화의 첫인상으로 정했다. 마작패를 직접 만져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그 질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수많은 마작패가 질서있게 단단히 고정되었고, 나비넥타이를 한 츠네오는 마치 하나의 사각형처럼 이어진 그것을 숙련된 손놀림으로 꼼꼼하게 닦는다(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신이 놀랄만한 솜씨로 흐트러진 마작패를 순식간에 빨아들이고 새로운 정렬을 만들어 올리는 이어지는 장면은 덤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을 기분좋게 만든다. 


일본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종류의 질감에 충실하다. 특히나 음식에 집착하는 그들의 영화에서는 부엌에서 나는 도마와 칼질소리, 무언가 기름에 튀기는 소리, 나무 밥그릇을 따듯한 손으로 감싸쥐는 모습 등이 클리셰처럼 빠지지 않고 나온다. 게다가 제목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근사하지 않은가. 영화의 초반까지 나는 꽤나 즐거웠다. 조제라는 특이한 이름, 그리고 호랑이와 물고기라는 굉장히 직접적인 터치의 의미를 기대하며.  


진솔함


그런데 중반에 들어서고, 서사와 갈등이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을 때, 조금 의문이 들었다. 질감의 근사함과는 별개로, 좀 부담스러운 것이 있었다. 일본 특유의 청소년적 건전함이나 만화를 영화로 옮긴 듯한 간지러운 전개나 연출(유모차 아래 보드를 깔고 함께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모습)도 그랬지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츠네오라는 캐릭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 츠네오의 '진솔함'이었다.  


츠네오는 (적어도)솔직하다. 물론 그는 내키는 대로 입술을 탐하는 바람둥이고, 그렇다고 그런 연애관에 자신만의 철칙을 만들어 거기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넉살이 좋고 마음이 착하며, 그런 자신의 마음과 충동에 솔직하다. 무엇보다 조제에 대한 사랑에 솔직하다. 그녀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영화 내에서의 그에게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진). 우에노 주리(...가끔 개인적으로 극중 역할에 몰입하기 힘든 배우들이 있다)와 썸을 타고 있는 상황에서도, 조제의 손가락을 만지는 츠네오의 손길은 조금도 거짓된 것이 아니다. 그는 영화의 후반에 자신의 입으로 직접 '조제를 버렸다'고 말한다. 다른 핑계를 대지 않았고, 그는 우에노 주리(카나에라는 단어는 입력되지 않았다)의 앞에서도 울었고, 그 관계를 미화하지도 않았다. 


시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알몸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교내를 활보하는 듯한 그 솔직함을(혹은 자기고백을), 나는 그다지 보고 싶지도 않고, 예술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보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은 뒤에 묵직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는다. 


'진솔함'이란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인정받는 어떤 가치가 될 수 있을까? 그 당연한 회의가, 어째서 '진솔함'이라는 단어에는 그렇게 쉽게 붙지 않았는가. 거기엔 '적어도'라는 마법같은 수식어가 진솔함에 쉽게 달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진솔하진 않았는가'


츠네오는 반짝거리는 캐릭터다. 그는 지식인인 척 고뇌하지 않는다. 그럴듯한 자기기만도, 그로 인한 합리화도 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꽉 닫힌 조제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넉살 좋게 밥을 받아 먹으면서도, 그게 너무 맛있어서 피식 웃는다. 반찬을 잔뜩 가져다 주면서도, 동정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고민하지는 않는다. 그의 그 가볍고 웃음짓게 만드는 동정심, 혹은 사랑이, 분명히 부담스럽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고민이되었다. 그런 캐릭터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내가 어떻게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하는 관객으로서의 나는). 그가 감히 책임지지는 못할 즐거움을 뿌리고 다니는 것을 기어이 막아버리고, 스스로의 규제로 인해 시무룩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을 굳이 세상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두어서 그의 가벼움에 대한 대가를 주변사람들이 피곤하게 감내해가며 살아가야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당사자인 조제의 의견은 어떨까. 어쩌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조제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조제는 분명히 모욕당했다. 둘만의 추억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관계가, 이쁘장한 그 남자의 애인한테 마음대로 떠벌려지고, 못난 남자는 그 상황에 어버거리며 한 마디도 못했다. 변명이나 사과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츠네오는 솔직해서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조제가 마음을 한 번 더 다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일 테다. 그런데 조제는 그런 츠네오를 원했다. 그 모욕적인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않고, 그 상태로 그냥 츠네오를 끌어 안았다. 그런 것들을 재기에, 조제는 너무 외로웠다. 정말 근원적으로, 끔찍하게 외로웠기 때문에, 이번에는 할머니도 없는 그 방에 또다시 갇혀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냥 츠네오를 원해버렸다. 자신의 집에 드나들던 그 존재를. 


결과는 그랬다. 츠네오의 일방적인 진심만이 있었고, 조제는 이제 스스로가 말했던 것처럼 조개 껍데기처럼 데굴데굴 굴러가며 살아간다(울퉁불퉁한 도로를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흔들리는 조제의 머리). 예견된 장면이었지만 사실 의외였다. 걱정했던 것만큼 건전한 결과로 가지는 않았고, 쉬운 결과를 택하지 않았던 것은 좋았다. 어쩌면 누군가, 혹은 모두가 만족할만한 엔딩을 굳이 만들어내는 것이 오히려 모욕적일지도 몰랐다. 내가 답을 결국 내리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답을 내리지는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무표정한 조제의 담담한 다이빙. 그것이 묘하게 현실적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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