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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un 13. 2018

[영화] 룸

'작은 주인공, 그리고 그의 고향'

Room 2015 - 레니 에이브러햄슨





'방'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테마다. 가까이 본다면 <쇼생크 탈출>의 감옥이 그렇고, 멀리 본다면 <캐스트 어웨이>의 무인도도 역시 일종의 방이다. 많은 서사들이 '방'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방은 자유가 제한되고 정서적으로도 고립된 부정적인 억압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갇히고, 작은 창문이나 먼 바다를 보며 탈출만을 끊임없이 생각한다. 어둡고 음침하고 쓸쓸한 이곳에서.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모두가 예외없이 그 방을 즐기고 있다. 우리가 '방 서사(마음대로 이름 붙이길)'를 즐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그 작은 방에서, 그들은 참 아기자기하게도 논다. 영화 <룸>에서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물론 그들이 방에서 탈출하기 전까지 차고에 갇힌 바로 그 세계의 묘사다. 나는 아직도 그 장면, 그러니까 아이를 귀찮아한 조이가 아들인(영화의 후반까지 나는 '아들'인 척 해야만 하는 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잭에게 쿠킹호일을 하나 던져주며 'UFO 만들고 놀아야지'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 작은 방의 일상이 집약된, 그러나 그 때문에 지나가는 듯 사소한 그 순간에 느껴지는 그 방에 대한 애정(이미 자신의 육체가 되어버린)이 그렇게 쉽게 표현될 수 있을까. 이름은 있지만 실존하지 않는 개와, 바깥 세계로 사라져버렸다는 쥐. 마치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바깥 세상의 '룰'처럼, 닉이 찾아오면 잭은 옷장으로 숨어서 작은 틈으로 그를 관찰하고. 작은 차고에 불과한 그 룸은 그 세계만의 생태계를 견고하게 갖추고 있다. 그들은 그 세계에서 탈출하려고 발버둥치지만, 동시에 그 세계를 얼마나 한껏 누리고 있는가. 


때문에 룸에서 나온 이후의 서사가 오히려 지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뒤에 벌어지는 일들은 '있을 법한' 일들을 넘어서 이젠 지겨운 클리셰들로 점철되어 있다. 흔한 것이 되어버린 대중과 언론의 과도한 관심. 그 역효과. 바깥 세계와 그간 벌어진 사건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 약으로 자해를 하는 조이. 마음이 닫힌 아이에게 능청스럽게 접근하는 레오(그래도 그건 좀 매력적이었다). 모르는 옆집 아이와의 공차기. 그리고 자신들이 있었던 차고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는 두 사람. 작은 방에선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상상력들이, 왜 세계에 나오면서부터 '있을 법한 일'들의 억압에 가려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가. 이미 모두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그 사건들이 기어코 나와야만 했을까.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특별한 아이 잭은 다른 식으로 살아가면 안 되었을까. 나는 어른들이 그가 필요할 것이라고 대충 생각해서 던져주는 물건들을 잘도 넙죽넙죽 받는 아이 잭이, 그래도 마음속에선 레오의 강아지가 자신이 그토록 찾던 개와는 그래도 다른 개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여전히, 조금 더 커진 세계의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거라고). '문이 열리면 룸이 아니'라고, 마치 누군가의 말을 대신 읊어주는 것 같은 잭의 후반부 대사는, 그래서 조금 갑작스러웠다. 그건 아마도 오랜 세월 갇혀서 문만 바라보며 살았던 조이가 해야할 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잭의 세계에서 '문'이란 개념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주인공


'내 딸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구나'


낯선 사람들을 겁내며 멀뚱멀뚱 앉아있는 잭에게, 조이의 부모가 와서 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 보고 있었던 <룸>의 인물 관계도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잭을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어린 아이의 시점을 시도하는 서사는 많이 있었지만, 그들을 정말로 주인공으로 대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인 잭에게 아주 커다란 일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그 순간은, 분명 잭을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보다 큰 사람들과 세계를 올려다보는 듯한 카메라의 앵글과, 작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마치 백색 소음처럼 지나가는 어른들의 사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여겨지는 '조이'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내가 '잭'이란 캐릭터에 몰입했기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사람 '잭'이기 때문이다. 








- 많은 음식들이 스쳐가듯 나오곤 했지만, 인상에 남는 것은 레오가 잭에게 주는 시리얼이었다. 동물들은 '누군지 모르는' 존재가 보는 앞에서, '아무거나'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 음식을 먹는 것을 보여준다는 행위는 그 눈앞에 있는 존재에 대한 신뢰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다. 조이의 친어머니와 친아버지 사이에 끼인,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능청스럽고 매력적인 레오는, 순수하게 동물적인 잭의 눈에도 분명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 나는 어린 잭의 육체를 훑는 성애적인 '의도'의 카메라 시선을 분명히 느꼈는데, 동시에 처음에는 여자로 묘사된(he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닉의 성적 대상화를 피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되도록 만들어진 구성) 잭이, 후반부에 반전적으로(그러나 능청스럽게 처음부터 남자로 언급했으므로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는) 그 정체가 드러날 때 생기는 반전감 역시도 마찬가지로 '의도'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룸에서 탈출 방법을 고민하다가 잭을 아프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물을 끓이는 장면을 일부러 보여주는(그리하여 뜨거운 물을 잭의 얼굴에 부어버리는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감독이 분명 관객을 속이는 재미를 알고 있다는 심증을 지울 수가 없다. 정말 여자애처럼 예쁜 잭의 노출(?)도를 이리저리 조정하며 관객들(아마도 특히나 남자들)의 머릿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성정체성의 혼란을 상상하며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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