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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8. 2018

[영화] 킹스맨

'매너의 정체'

Kingsman 2015 - 매튜 본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킹스맨>은 스스로 메시지를 중화시키는 영화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재단'하는 것은 매너다. 그것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고 모두의 투쟁 사이에서 폭력을 제어하고 삶을 유지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매너의 정체는 저만 살겠다고 모두를 팔아 도망치는 이기적 특권에 지나지 않는다. 킹스맨 내부의 분열과 지도자인 아서 역시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이기심을 처단하는 것도 매너(이자 비매너의 주인공)다.


그렇다고 그런 매너 자체의 한계성을 고발하는데 골몰하지도 않는다. 영국 억양을 역겨워하는 악당 발렌타인의 논리는 물론 솔깃하며, 결과적으로 폭발한 특권계급의 머리폭죽쇼도 일면 통쾌하다. 비매너의 정점인 발렌타인이 새로운 세계의 일원으로 지도층들을 선택했다는 것도 모순적이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인 에그시는 매너적 캐릭터인가 비매너적 캐릭터인가?


그래서 <킹스맨>을 보고 나면 뭘 말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상호 분쇄적인 메시지의 뒤엉킴 때문에 전언 자체가 결국 중화되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영화의 순수한 질료(실은 이 영화의 유일하고 핵심적인 매력이라 할 수 있는)인 '수트 간지'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중얼거리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메시지는 메시지라기보다 질료로서의 비어 있는 '슬로건'다. 그들이 입고 있는 수트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인 액세서리다. 이 영화는 '정말로 매너 만이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매너'는 실은 '비매너' 만큼이나 야만스러운 개념이라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드러나고 있다. 


매너가 무기가 되었을 때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교회에서의 전투신이다. 이 영화를 '매너'와 '비매너'의 대결구도에 주목하여 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에서 느껴질 카타르시스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매너의 대명사이자 '킹스맨'의 가장 우수한 요원인 해리가, 그동안 갈고 닦은 '절도 있는' 전투실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가차없이 한명 한명 죽여 나갈 때, 무기가 되어버린 매너의 비극성은 점점 깊어진다. 그것은 매력적인 비극 아이러니다. 목적을 잃은 '매너'가 얼마나 강력하고 파괴적인 살상 무기가 될 수 있는가. 롱테이크의 전투신의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긴장감은 더해간다. 그가 '매너'로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힘써왔을 시간들과, 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매너'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오롯이 육체에 수트처럼 걸쳐진 '매너'의 잔인성이 마음껏 활보하는 이 전투신은 통쾌하기 그지없다. B급 잔인성 자체가 영화의 미학 그래프와 일치하게 되어 동시에 증가하는 짧은 시간이다. 즉 이 장면에서는 잔인할수록, 메시지적이다. 


애초에 매너란 무엇인가 


'모름지기 군자란 비가 오는 와중에도 뛰지 않는다' 

한국도 '매너'에 있어서는 역사적으로 어디에 뒤지지 않는 나라다. 


매너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절제다. '그들'은 무엇을 절제하는가? '생존'과 관련한 움직임이다. 식사를 천천히 하는 것, 위기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도 제한된 옷차림을 하고 일정한 동작을 지키는 것. '상황'과 관계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 '생존'과 관련한 급박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여유'라는 공백을 남겨 둠으로써, 실은 그 생존에 관해 더 우수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과시. 그것이 매너의 가장 근원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매너는 역사적으로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가진 자'들은 물론 생존에 유리하고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 그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목도리 도마뱀의 목도리와 같은 '잉여'적 액세서리. 그러나 '잉여'는 실은 '여유'와 '가진 것'에 대한 과시다. '나는 이런 잉여가 생길 정도로 많이 가지고 누리는 자다'라는 선언. 


허겁지겁 사냥한 고기를 뜯어먹는 배고픈 원시인들을 보며, 아니 나는 배가 좀 불러서 말야, 라고 느긋하게 이를 쑤시는 배부른 원시인의 여유. 아마 그런 데서 매너는 출발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매너는 가치가 바뀌었을 것이다. 매너 그 자체가 하나의 과시의 코드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 사태는 역전된다. 정말로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조차도 매너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거짓으로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부터 매너란 진정한 '과시'의 목적을 잃고 하나의 '위장'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혹은 매너를 향유할 사람들의 조건을 떠나, 소비적인 기호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매너는 여전히 원시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과거에 지녔던 그 위력과 상징의 힘이, 여전히 그 질료에 남아있다. 현대의 많은 영화나 만화에서 정장을 입고 전투에 임하는 자들의 힘과 여유에 대한 근사한 매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우리의 무의식적 본능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킹스맨>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수트와 우산이 어떤 권력과 원시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화는 '매력적'일 수 있다. 실상은 그것이다. 화끈한 액션과 B급 정서 때문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원초적인 기억에 의해 이 영화를 즐겁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힙합력이 넘치는 흑인 한 명



또한 재미있는 것은 철저하게 매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흑인인 발렌타인의 존재다. 뉴에라를 쓰고 카라티 깃을 끝까지 세우고 단추를 잠그고, 방금 막 구입한 것 같은 스니커를 신으며 빅맥과 와인을 함께 즐기는 이 영화의 귀염둥이 빌런 발렌타인은 이러한 매너를 철저하게 파괴한다(혹은 다른 세계의 다른 매너일 수도 있다). 그의 슬랭한 말 한마디 한마디,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의 존재 자체가 매너의 파괴이다. 영화는 매너를 쌓고 매너를 스스로 파괴한다. 이러한 자기파괴의 모순적 논리가 <킹스맨>의 독특한 지점이다. 그것은 매너의 반성적 성찰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매너가 순수한 악인 것도 아니다. 그들 자신이 대변하는 어떤 메시지들은 영화 자체의 논리를 살짝 비껴나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지루한 영역에서 교묘하게 벗어나 '쿨내'를 마음껀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영화의 질료가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니까. 디즈니 <판타지아>의 노아의 방주 편을 본 사람이라면, 어째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발렌타인의 방주에서 그들의 머리가 형형색색으로 폭발할 때 '위풍당당 행진곡'이 울려퍼졌는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킹스맨>에서는 이런 귀여운 짓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리하여 <킹스맨>이라는 영화를 보고 눈을 감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구두와 우산, 깔끔한 정장과 뿔테안경, 그리고 권총. <킹스맨>은 주제나 플롯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그냥 그것들이 이 영화의 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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