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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21. 2018

[영화]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악마는 어디에?'

Paganini: The Devil’s Violinist 2013 - 버나드 로즈

 



파가니니를 연기한 주연 배우 데이비드 가렛은 진짜 바이올리니스트고, 극중 연주 장면들은 모두 그가 직접 연주했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 양날의 칼 같은 것이었다.


먼저 그가 연주 장면을 제외하고 도대체 무엇을 연기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잘생김. 분명 19세기에 덜렁 소환된 존 레논 같은 복장과 긴 머리의 그는 등장인물 중에서 군계일학처럼 잘생겼다. 뭐든 녹일 듯한 눈빛, 잘은 모르겠지만 서양 문화권에서는 매력적일(?) 수염자국. 허용 가능한 장발. 그리고 항상 끼고 다니는 바이올린.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이미 가만히 앉아 있거나 뚜벅뚜벅 걸어다니기만 해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이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부제에 잔뜩 기대를 했기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악마는 도대체 어디에? 영화 내에서 파가니니는 너무 말수가 적고, 딱히 치기도 없고, 아들한테는 따뜻하고, 사랑은 순진하고, 표정은 별로 변화가 없었고, 감정이 격렬하지 못했다. 그래, 악마는 어쩌면 우르바니였을지도 모른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뭔가 서양 악마처럼 생겼잖아. 파가니니는 그냥 그 사람이랑 계약을 했던 순진하고 재능있는 청년이고. 그런데 악마와 계약할 만큼의 어떤 절실함이, 영화에 한 번이라도 등장한 적이 있었나? 가끔 별로 떨리지도 않는 손으로 마약(?)을 마시고, 어조의 변화가 없는 목소리로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사랑을 나눌 때조차 소문처럼 대단한 바람둥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런 광기도 없는, 어딘가에 끌려나온 듯한 순진한 청년. 그를 악마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주변을 따라다니는 종교 단체의 덧없는 메아리 같은 구호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이올린을 잡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프로연주자답게 그의 몸짓과 표정 자체가 달라졌다. 차분하게 어깨와 등에 드리워졌던 장발이 마구 휘날리기 시작하며, 그는 앞뒤로 몸을 미친듯이 움직이며 바이올린을 켠다. 몸짓으로만 보자면, 그는 연주하기 전의 그 순진한 청년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시키는 것만(그것이 대본은 아닐까) 그럭저럭 조용하게 수행하던 수동적인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의 연주(특히 술집에서 현 하나로 하는 연주)가 듣기 즐거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럼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악기만 잡으면 광기에 빠지게 되는 설정의 캐릭터인가? 그렇게 생각하자니 평소의 그는 딱히 광기가 끝난 자리의 공허함이나 집중하기 전의 나른함 같은 것을 연기하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굳이 파가니니의 일생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이 영화 내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가니니는 그의 일상 생활 자체가 악마로 표현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방탕한 바람둥이. 그러나 그것을 꾸며주는 것들은 오로지 주변의 소문(다른 배우들의 대사)일 뿐이고, 정작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뭔가 김빠진 맥주 같은 밍밍한 캐릭터 하나였다.  


쉽게 생각해버리면 그렇다. '파가니니'가 아니라, 본업이 바이올리니스트인 데이비드 가렛이, 바이올린을 잡으면 신들린 듯한 연기력(그것을 연기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을 발휘하고, 본업이 아닌 영화배우로서의 역할에서는 조금 맥빠진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무수한 소문을 뿌리며 일상 자체가 화제가 되던 괴인 '파가니니'는 실종되고, 멋진 연주를 들려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하나 있다. 자, 그러면 이 영화의 진짜 모습이 눈에 잡히는 것 같다. 이것은 어떤 인물의 일대기를 표현하거나, 흥미로운 서사가 담겨 있는 영화가 아닌, 중심에 자리잡은 연주 장면들을 위주로 돌아가는, 귀가 즐거운 '콘서트 영화'다. 그런 영화가 있을 수 있다. 작은 콘서트에 온 것처럼 연주를 보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도 분명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단지 '파가니니'라는 흥미로운 인물에 대한, 만족되지 않는 궁금증만 더 생겼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별다른 메시지나 감동 없이 본전만 찾는 다른 히어로 영화를 볼 때마다 <다크 나이트>가 생각나곤 하는 것처럼, 이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문득 <아마데우스>가 떠올랐던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연주장면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바깥 이야기,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독창적인(?) 모차르트의 웃음소리.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잡은 파가니니(데이비드 가렛)가 보여줬던 그 에너지를 무대 밖에서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그의 표정이, 왓슨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성격이, 오히려 주인공이 아닐까 싶었던(차라리 그가 주인공이었다면 좋았을) 우르바니와의 관계가, 한발짝만 더 앞으로 나갔으면 영화가 좀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나무와 하얀 페인트, 곡선 장식, 유럽


그런 이야기들과는 별개로, 내가 이 영화를 즐겁게 봤던 포인트는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있었던 유럽에 대한 동경(성과 예쁜 지붕들과 건물, 간판과 가로등, 벤치...) 덕분에, 나는 이렇게 유럽이 배경인 영상물을 보면 무척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데우스> 이야기를 해서 그렇지만, 그 영화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여긴 영국이지만...). <아마데우스>의 공간이 뭔가 뿌옇고 황색의 안개 속에(옛날 영화니까) 잠겨 있는 것 같다면,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안개가 걷히고 더 상쾌한 느낌의 공간감이 들었다. 그 느낌이 가장 분명하게 들었던 것은 왓슨의 집이었다. 하얀 벽과 계단, 창문으로 들어오는 투명한 햇빛.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 그런 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딘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 곳에 살아본 적 없는 내가 도대체 어떻게 '그리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궁금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은 아주 오랜 기간 예전 우리집의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이었다. 그 거울은 사람 몸통 정도의 크기에 피아노 다리처럼 동그랗게 꼬인 여러 장식들로 틀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비슷한 느낌의 촛대(한 번도 불이 켜진 것을 본 적은 없었다)도 걸려 있었다. 거기는 화장실 옆이었고, 화장실 문 또한 비슷한 문양에 하얀 페인트로 덮여 있어서, 딱 그 공간만 떼고 보자면 유럽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봐도 괜찮을 정도였다. 아마도 예전에 그런 장식품을 팔던 이모의 가게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지금 와서 생각하지만, 그때는 딱히 그것을 유럽적이라고 의식한 적도 없었고(나는 어릴적 그렇게나 유럽적인 것을 갈구했었는데도), 그냥 집에 있는 '거울'이 아닌 무언가 특별한 오브제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거울이 생각난 것은, 거기다가 마치 유럽의 어딘가의 작은 공간을 내 추억처럼 가장하여 머릿속 한편에 몰래 숨어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런 것들이 종종 본적 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그려내는 꿈을 만들어내는 재료들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래서 나는 왓슨의 집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하녀로 가장한 왓슨의 딸 샬롯이 음식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그 공간이, 먼 곳에서 맑은 목소리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동과는 상관 없이 조용하고 차분하고 투명한 공기로 차있는 그 곳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수용이론이든, 풍크툼이든 간에, 나는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를 그렇게 조금 개인적인 관점에서 즐겁게 보았다. 바이올린을 켤 때만 멋진 어색한 연기의 존 레논이 그 공간을 기웃거리긴 했던 것 같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원래의 파가니니는 이렇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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