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반대말, 인간
문학적 모티브로서 종종 언급되는 유명한 작품들이 있다. <매트릭스>가 그렇고, <라쇼몽>이 그렇다(개인적인 의견으로 <인셉션> 또한 앞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작품들은 작품성과는 별개로 그 영화가 스쳐지나가며 건드린 어떤 사유가 굉장히 짙고 의미심장하여 많은 생각의 여지를 남기므로, 심지어는 일종의 '비평적 용어'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이미 영화가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많은 소설과 다른 작품들이 변주곡처럼 저마다의 소리를 내다가도 이런 작품들의 모티브로 결국 돌아오는 것을 보며, 아마도 앞으로 많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 기념비적인 작품들의 중력장은 전혀 손색없이 예술계에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물론 그 이전에도 이런 소재들을 다룬 작품들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확실히 기념비가 된다는 것은 대표가 될 만한 어떤 우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라쇼몽>을 본 적이 없었음에도, 수없이 언급된 그 모티브를 듣고 내용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으며, 미루고 미루다 결국 실제로 영화를 보게 되었을때, 영화가 다뤘던 주제는 내 상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진실? 인간?
<라쇼몽>은 종종 세상의 진실의 부정확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용되곤 한다. 어떤 것이 진실일까, 라는 익숙한 사유를 넘어서, 진실 그 자체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때(이는 현대 예술에서 자주 다루는 '매력적인' 소재다), <라쇼몽>은 마치 그 물음에 대한 답처럼 제시되곤 한다. 한 가지 사건을 바라보는 세(네) 가지 해석.
사람이 하나 죽었다.
-그것은 명예로운 결투의 결과였다.
-부당한 혐오에 대한 대가였다.
-지독한 배신에 못 이긴 억울한 자결이었다.
-혹은 치졸한 겁쟁이들의 슬랩스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증언하는 사람들 모두가(나무꾼을 제외하면) 범인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아에서 다루는 죄는 '살인'이지만, 각각의 증언에서는 죄와 살인이 별개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살인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비극처럼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인죄를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하나같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하나라면 죽인 사람도 하나라는 어떤 진실의 전제를 생각할 때, 결국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의 주체를 자신으로 설정하는)고백처럼 보이는 이 증언들은 그러나 실은 모두 항변이다. 거짓말은 무언가 숨겨야 할 것이 있을 때 생겨나고, 무언가 숨겨야할 것이 있는 존재는 진실이 아니라 인간이다. 진실과 전제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분명 재미있는 관점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그 자체다.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할 수 있을지. 버려진 갓난 아기를 감싼 보자기를 훔치는 인간들이 득실거라는 수라의 세계에서 희망은 있는 것인지. 요즘의 관점으로는 좀 낡은 주제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점의 영화에서 <라쇼몽>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인간에 관한 문제이다(심지어 마지막에 나무꾼이 아기를 안고 가자 때마침 비도 그치고 햇빛도 비치지 않는가, 촌스럽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희망은 있다, 고).
이런 주제의식은 기념비적인 작품의 조건에는 다소 못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쇼몽은 그 작품의 의도와는 다르게 세계와 진실에 대한 재미있는 지점을 찌르고 있다. 작품의 메시지는, 실제 작품의 매력 포인트와는 서로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예술 작품에 작가가 담아 놓은 메시지('주제'라고 할 수 있는)가 매력적이라면, 우리는 그 '작품'이 매력적이다, 라고 말하기보다 '작가'가 매력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전언과는 상관없이 작품 그 자체를 우리가 재미있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그 '작품'이 매력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쇼몽>은 분명 '작품'으로서 매력적인 영화다.
-여기서부터는 진짜 감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들.
-<라쇼몽>은 '햇빛'이 굉장히 강조된 영화다. 햇빛은 나뭇잎 사이에서 반짝거리기도 하고, 인물들의 얼굴에 어른거리기도 한다. 햇빛이 가장 인상적으로 활용된 장면은 관아에서 인물들이 증언할 때 마당에 쏟아지는 햇빛과 그 햇빛을 맞고 있는 두 관전자들.
증언을 하는 인물들이 항상 그늘진 장소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빛과 대조된 어둠이 진실 이면의 거짓이라는 도식화된 비유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뻔한 일이지만, 그건 제쳐두고 뒷 배경에서 그림처럼(실제로 그냥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미동도 없이 햇빛을 맞으며 우두커니 앉아 있는 두 인물의 모습에 계속 눈이 갔다. 온 몸으로 햇빛을 받고, 햇빛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세계. 형광등 빛이 아니라 햇빛이 일상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을 종종 덥히곤 하던 순간들을 잊고 살아간 지 오래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운동회 날, 운동장 흙바닥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 내 주변에 가득하던 가을 햇빛. 나는 그 햇빛들을 그 때는 결코 일부러 피하지 않았던 것 같다. 흑백영화에서 햇빛이 강조되는 것은,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당연한 일일까.
-음식은 아예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작품에서 음식이 등장할 때는, 그 작품에 어떤 여유가 있을 때다. 한창 서양과 비교하며 기술을 발전시키고 따라잡아야할 동양의 영화에서 음식이 주목 받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가장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고려검'. 산적 다조마로는 왜 일본도가 아니라 뜬금 없이 '고려검'을 들고 있었을까. 이 소도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알게모르게 강조되고 있는데(특히 일본도를 든 무사와의 대결에서), 이 잉여적인 소도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필요하고, 때문에 매력적이다. 눈 앞에 계속 아른거리는 고려검.
-무녀가 신들리는 장면은 정말 무서웠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