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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07. 2018

[영화] 아티스트

'무성의 목소리'

The Artist 2011 -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장르에 관하여


예술은 언제나 기술과 함께 변해왔다. 그 중에서 영화는 기술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장르다. 최초의 영화는 벽에 비춰져 움직이는 '그림'이었다. 그 이름의 어원이 그렇듯이. 그러나 지금의 영화는 어쩌면 하나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2016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입체적인 소리와 울림, 색과 형태, 입체감(3D) 등으로 한껏 포장된 '공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원래의 영화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익숙하게 느낄 수가 없다. 입체적인 소리도, 화려한 색도 없이 흑백화면이 무덤덤하고 어색하게 흘러가는 과거의 영화를 본다면 현재의 우리는 분명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실은 그 (의도된) 답답함이, <아티스트>란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법이자 주제다. 


주인공 조지가 유성영화가 나오던 시기에 무성영화를 혐오했던 무성영화의 거장 찰리 채플린을 떠오르게 한다는 사실은 새삼스럽다. 두 인물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해 예술적인 관점의 거부를 보인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 줄 새로운 종류의 미학에 대해 굳이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이전의 것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중들은 절 보러 오는 것이지,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에요."

"전 당신 없이 새로운 걸작이나 만들테니, 당신은 유성영화나 만드세요."


두 사람의 차이는 있다. 채플린은 여전히 무성영화를 만들며 <모던 타임즈>같은 걸작 영화를 만들었지만, 조지는 직접 감독을 한 <사랑의 눈물>이 흥행에 실패하며 파산한다. 


조지는 "유성영화는 진지함이 없다"라고 했고, 페피는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배우들은 한물 갔잖아요..... 새것이 들어가려면 옛것이 자리를 비켜야죠"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대결에서 분명 조지는 명백히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란듯이 걸작 '무성영화'로서 재기하지는 못한다. 페피 밀러는 과거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 이상의 부를 누리고 있다. 비록 후반부에 페피와 조지가 화해의 무드로 돌아가 함께 탭댄스를 추는 영상을 합작하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퍼포먼스라는 것은 명확하다. 정말 시대는 바뀐 것처럼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뻔뻔함이다. 무성영화는 패배했다. 관객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아티스트>란 2011년작 영화는 어찌된 일인지 흑백 무성영화가 아닌가? 내용상으로는 무성영화의 패배를 다루면서도 그 내용을 담은 그릇은 무성영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어떤 부분에서 무성영화의 승리를 암시하는 장치일까? 혹은 항상 이런 종류의 대결에서 쉽게 말하듯, '무성영화는 무성영화 만의 무엇인가가 있다.' 정도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 마치 '종이책은 영상물이나 Ebook이 대체할 수 없는 종이책 만의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 애교스런 뻔뻔함의 실마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암시적인 장면에 담겨 있다. 갑자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조지의 꿈이 나오는 장면. 시대를 초월한 무성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며 스스로 인식하기도 힘든 어떤 (귀의)먹먹함을 느끼던 관객은, 조지가 유리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탁'하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영상 위에 진하게 덮인 음악이 가져다주는 먹먹함을 뚫고, 귀에 별안간 들어오는 그 자연스럽고 새삼스런 사물의 소리에 청량감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그 꿈에서 이상한 것은 조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관객이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조지 스스로도 자신의 목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거울을 보며 절규한다. 개가 짖고, 전화벨이 울리고, 여자들이 웃고, 심지어 하늘하늘 떨어지는 깃털이 폭발음까지 내는데, 왜 조지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인가. 


이 암시적인 장면은 마지막의 탭댄스 공연에 이르러서야 의미적 연결이 가능하다. 탭댄스 공연은 겉으로 보기에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를 대변하는 조지와 페피의 갈등의 화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거기엔 조지의 꿈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탭댄스의 구둣발소리는 '사물의 소리'이다. 기술의 발전 덕분인지, 이제 사물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지는(그리고 페피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조지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물의 소리가 나는 '유성영화의 시대'에서도. 아니, 조지는 애초부터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입을 크게 벌린 조지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되는 영화에서, 조지는 입을 벙긋거릴 뿐, 사실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입의 움직임이다. 입을 벙긋거리는 동작이 '말'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들 자신의 상식과 문맥적 상상력에 의한 것일 뿐이다. 영화 속의 세계에서 조지는 '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데, 이는 조지 그 자신이 바로 '무성영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조지는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어차피 결국은 화해를 할)페피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성 영화계의 새로운 스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실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라는 기술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애초에 그란 '소리'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페피의 대본을 던져버린 것은 그의 오만함이나 고집이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인한 것이다. 


여기에 착시에 대한 해답이 있다. '무성'과 '유성'은 '영화'라는 장르적 구분 아래에 한데 묶여 언급되기 때문에, 이것은 사소한 기술적 요소의 차이로 구분되는 같은 '장르'라는 의식이 생긴다. 때문에 그것은 시대적으로 과거와 현재(혹은 미래), 뒤떨어짐과 새로움, 결핍과 우수함이라는 구분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결핍'에 대한 지향성을 물론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분명 그것들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2011년도에 흑백 무성영화의 기법을 소환하는 것이, 복고풍이나 향수에 대한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거기엔 분명히 새로운 욕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영화'라는 장르 내에서 억지로 묶었던 구분을 해체하고 나서야 확인이 가능하다. '유성영화'와 '무성영화'는 별개의 장르이다. 마치 회화와 음악이 전혀 다른 장르의 예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분명한 욕구가 있는 것이다. 굳이 '시대'라는 착시를 불러오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 욕구는 <아티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며 감각적으로 느꼈던 모든 효과에 숨어있다. <아티스트>에는 소리와 관련한 의도적인 장치가 많이 드러나있다. 커다란 비명소리를 암시하는 크게 벌린 조지의 입으로부터 시작하는 첫 장면이나,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태연스럽게 돌아가는 턴테이블의 모습처럼. 그러한 장치들이 일으키는 감각의 교란과 욕구의 재인식을 따라가다보면, 분명 우리는 단순히 결핍으로만 보였던 '소리의 실종'이 그 공백 자체가 어떤 에너지가 되어 우리의 또 다른 욕구를 자극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장르적 구분과 맥락의 인식은 간혹 우리의 판단과 기호를 혼돈스럽게 하지만, 욕구는 언제나 솔직하다. 욕구가 있는 한, 분명 거기엔 해답이 있다.(종이책의 생존과 관련한 논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경쾌한 탭댄스의 음악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짠. 


적막과 숨소리. 컷, 소리가 들리고, 한 번만 더 해줄 수 있겠나? 하는 질문에 물론이죠, 라고 육성으로 대답하는 지금의 그는, 소리를 되찾은 '조지'라기보다 모든 무언의 대사를 끝낸 장 뒤자르댕이 아닐까. 








- 음식처럼 느껴지는 음식은 나오지 않았다. 


-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 중 하나는 주인공인 조지 역의 장 뒤자르댕의 해맑은 웃음이다. 그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걸쭉한 웃음은 진지하고 미남형인 본래의 모습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주변의 심각한 분위기를 순식간에 무장해제시켜버리는데, 관객들의 긴장감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것은 물론이다. 


- 연기력 출중한 강아지 어기에 감탄. 진짜 강아지인가 계속 의심.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다고... 


- 연기 속에서 연기를 하는 장면은 언제나 재미있다. 배우가 주인공인 영화들. 버드맨처럼. 그들은 연기 안에서 또 새로운 연기를 해야 한다. '액션'과 함께 한층 더 과장되면서 자연스러운 연기 속으로 빠져드는 그 표정들.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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