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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13. 2018

[영화] 레퀴엠

'마약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Requiem For A Dream 2000 - 대런 아로노프스키




일단 마약을 한 대 하고 시작하지


영화는 때때로 우리에게 '체험'할 것을 요구한다. 관객이 스크린 밖에서 안전하게 서사를 관망하며 의미를 판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멱살을 잡고 영화 내부 공간의 아스팔트 바닥에, 혹은 누군가의 몸 속에 강제로 집어넣는 경우가 있다. <반지의 제왕>같은 영화가 전자의 대표적인 예시라면, <그래비티>는 후자를 택함으로써 인상적인 효과를 거둔 영화일 것이다.


<레퀴엠>은 당연히 후자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마약을 한 대 주사한다. 관객이 '마약'이란 소재를 소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동안 직접 그것을 체험할 것을 요구한다. 디지털스럽게 분절된 화면, 빠르게, 혹은 느리게 감고 접었다 폈다 하는 시간, 어안렌즈 효과, 소음, 환상. 낱말카드 같이 최소한으로 의미화된 화면. 돈을 건넨다. 마약. 흡입한다. 주사한다. 약이 돈다. 커피를 마신다. 시간이 흐른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보는 듯한 특유의 리듬을 몇 번 통과하고 나면, 누구나 이미 몸 속에 마약의 기운이 서서히 도는 것이 느껴진다. 익숙해졌다 싶으면 조금씩 템포를 올린다. 헛것이 현실을 침해하는 정도가 높아지고 조명은 더욱 빠르게 깜빡거리며, 사람들은 괴성을 지른다. 화면이 마지막엔 더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교차되다가 퍽! 팔이 날아간다. 


중요한 것은 날아간 팔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저게 날아가게 된 걸까. 현란하고 실감나는 화면이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동안, 뒤에서는 서사가 꾸역꾸역 진행되고 있다. 말 그대로 꾸역꾸역. 감탄했던 것은 이런 류의 '현란한' 시도가 자주 특수한 효과 그 자체에 집중하거나 스스로 설정한 어떤 의미심장한 장면에서 한참을 멈춰서서 어떤 감정이나 해석을 강요하곤 하는데, <레퀴엠>은 그런 것에 별로 미련이 없다는 듯이 서사를(그것도 나름 흥미진진한) 천천히 밀고나가서 인물들을 파국으로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약'의 특징 그대로이다. 쾌락과 환상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는 그 세계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은 멈춘 것 같고, 시계의 초침소리는 눈을 깜빡이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들 뒤로 시간은 여전히 천천히 흐르고 있고, 비극은 점점 농도가 짙어진다. 그것은 한방향으로, 결코 멈추지 않으며 자꾸 앞으로 나간다. 


마약은 하면 안 돼


아쉬운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해리의 서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사라의 서사. 흔치 않은 스타일의 주연이었고, 초반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들이 흥미로워서 많은 기대를 했었는데, 중반부터 그녀의 이야기는 멈춰버렸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상태가 점점 악화된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진행이 없었다. 그녀는 막연히 초대장을 기다리며 (조금 식상한 목적의)다이어트에 유난히 매몰되어 있는 뻔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광기를 더해가지만 그것은 그냥 광기를 위한 광기였을 뿐, 전혀 이입되거나 괴기스럽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독립적으로 진행될 것 같아서 흥미가 생겼던 사라와 해리의 이야기는 중간에 접점이 생기는데, 그것이 단순한 신파적 효과를 더하려는 것(중간중간 나오던 흑인 친구 타이론의 어머니의 푸근한 미소처럼)이라는 사실에 김이 조금 새버렸다. 


다른 하나는 영화가 끝나고 문득 든 생각이다. 메시지보단 감각에 치중하는 영화라, '마약에 의해 점점 피폐해져가는 그들의 비극적인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정도의 의의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모든 서사는 의도를 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메시지'를 향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되었다'라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문장은 특별히 따로 강조하지 않는 이상 '이런 사람이면 이런 식으로 된다'고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레퀴엠>이 끝나고 남는 메시지는 '마약은 하지 말자 여러분'이라는 다분히 캠페인스러운 교훈(?)인데, 현란한 연출적 노력과 자비라곤 없는 Largo템포의 비극이, 겨우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물론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재상기시키는 정도로 귀결되는 것 같아서, 그게 좀 안타까웠다. 뭔가 더 나가길 바라는 것도 욕심인가. 


그리고 사라가 먹는 초콜릿. '갯수가 정해진 초콜릿'이란 그야말로 욕망과 마약의 상징이다. 생각해보면 초콜릿은 항상 개수가 정해진 음식이다. 그것이 커다란 바 모양이더라도 격자무늬로 꼭 구분되어 있다.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고 그것이 녹는 시간동안 느끼는 쾌락. 점점 줄어드는 쾌락. 마침내 입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딱 한 개만 더, 그런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는 쾌락. 사라가 초콜릿을 먹는 장면은 그 쾌락을 잠깐 머금은 듯한 모습처럼 보인다. - 인상적인 음식은 일단 아이스크림. 처음 마약을 하는 장면 뒤에 해리와 타이론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는 장면은, '마약 한 대 하고 먹는 아이스크림이란 어떤 맛일까'하는 궁금증이 절로 생기게 만들 정도로 좋은(?) 장면이었다. 쩝쩝거리며 찰지게 먹는 타이론을 보고 있으면 나도 뭔가 갈증이 생기는 듯...








- 2000년작이라 그런지, 현란한 그 연출도 뭔가 촌스러워 보이기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꼭 그 시절 다녔던 과학관의 영상들처럼... 그러고보면 2000년이란 내 인생을 가르는 분기점 같은 느낌이다. 2001년에 TV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는 것을 보았고, 그때 뭔가 나는 '더 이상 자라지는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앞으로 남은 실감할 수 없이 많은 시간들을 생각했고, 일년 이년 지나더라도 그저 작은 물방울 하나가 살짝 더해지는 정도의 여유로 그 시간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7년. 그때와 지금 사이에 고등학생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 세상에.


- 요즘 영화를 본 뒤에 배우들을 검색하며 충격을 받는다. 저 예쁘장하게 생긴 해리가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그 조커라고? 생각해보면, 히스 레저의 무거운 짐을 받아들일 '다음' 조커를 물색하며 무엇을 기대했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레퀴엠>의 어떤 것을 분명 염두에 두었겠지.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정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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