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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7. 2018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선형적인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

테드 창



최근 들어서 마땅히 마음에 닿는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의무감에 남은 페이지를 확인하면서 꾸역꾸역 읽는 것이 과연 '독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힘겹게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도 언제나 '결국 뭔가 있겠지'라는 기대는 배반당하기 일쑤. 겨우 이정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 지루한 것들을 '그럴싸한 모습으로' 늘어놓았을까.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 닿은 곳이 결국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얕은 곳의 풍경이라면. 그리고 또 다른 책을 뽑아들더라도 결국 그럴 것 같다면.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책을 읽기가 요즘 어려웠다. 현란한 것 같은 책들도, 진심어린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도, 다 읽고 가만히 눈을 감고 더듬어보면 결국 그들은 들인 노력에 비해 아주 조금밖에 꿈틀거리지 않았다. 의무처럼 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날아가버리는 글들. 진심으로들 썼겠지만, 어쩌면 그다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도 상관 없을 '작품'들. '독서'라는 것이 그렇게 신성시 될 필요도 없다. 보통 대부분은 이런 경험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추천 받았을 때, 나는 이런 책에 대한 회의를 경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아마도 내가 다른 책들로부터 의미있는 에너지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도 단지 장르적 취향이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건조하게 읽은 글들을 누군가는 너무 공감하고, 혹은 감동받았다고 하는 경우도 많이 봤으니까. 테드 창이란 베르나르 베르베르 정도의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고, 기발한 상상력이나 설정이 그래도 호기심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록된 <바빌론의 탑>, <이해>, <영으로 나누면>을 하나씩 차근차근 읽어갔다. 좀 약하다고 생각했다. 

<바빌론의 탑>은 최종 목적지가 처음과 이어진, 뫼비우스의 띠라는 구조 하나를 표현하기 위한, 1차원적인 표현의 소설이었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별 가공 없이 그냥 그렇게 쓰였다. 아이디어 자체도 그렇게 기발한 것은 아니었고, 그 아이디어 하나를 목표로 달려가면서 인물도, 배경도, 행동도, 이야기도 모두 무심하게 지나쳐버렸다. 신에 대한 관점도 직접적으로 제시했지만 별 감동은 없었다.

<이해>는 마치 보르헤스의 <알렙>처럼 무언가 '궁극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지능을 높인 두 인간의 대결을 통해서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궁극적인 영역을 여러 분야의 지식을 동원해 묘사하고 있다. 정공법으로 솔직하게 접근했기 때문에 정보를 따라가는 것 외에는 소설적으로 어렵지 않다. 과학적 언어학적 정보들을 벽돌로 쌓아올린 어떤 완전체의 묘사도, 테드 창이 들인 어떤 노력에 감탄할 수는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비싼' 벽돌로 매력적인 것을 쌓아올리지는 못했다. 

<영으로 나누면>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디어 자체를 시종일관 강조하는 데 소설의 목적이 있다. 상상력 자체는 즐거울 수 있다. 수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겠지만, 뭐 어때. 맞든 틀리든 상상해보는 건데. 그러나 스스로도 기발하다고 생각한 상상력인지, 챕터마다 열심히 a,b 를 붙이며 강조를 했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부담스럽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모든 것의 구분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나'라는 질문은 있지만 거기에 매력적인 대답을 들려주지도 않았고(아마 보르헤스라면 뭔가 근사한 것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또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키지도 않았다. 단지 강조하고만 있다. '영으로 나누면 말야, 그거 큰 일이 난다고!'. 


여기까지 읽고 책을 덮어두고 좀 지냈던 것 같다. 그래도 타이틀 작품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다시 펼쳤다. 타이틀작이라고 항상 가장 좋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찜찜하니까. <네 인생의 이야기>는 대단한 몰입력을 가진 이야기는 아니었다. 버릇처럼 몇페이지가 남았는가 세기도 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글을 읽는 동안 솟구쳤던 피가 다시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간만에 책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단지 이 작품 때문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그런 '아이디어'가, 충분히 가공된 뒤에 작품 전체에 스며들면 어떻게 작품이 풍성해지고 깊어질 수 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앞의 세 작품과 달리(뒤의 작품들은 아직 읽지도 않았다) 일단 최초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공개되기까지 여유가 있다. 나는 '음식'이 등장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음식이 주제가 아닌), 이런 작품들에는 항상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 외에도 충분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유가 있다는 것은 메인 줄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를 '불필요하게' 붙여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도 매력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최후에, 그것이 사실은 무언가 메시지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몹시도 근사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병행되어 진행된다. 하나는 자신의 딸에게 들려주는 듯한 나긋나긋한 엄마의 목소리(그녀와 딸의 이야기를 추억하는). 또 하나는 헵타포드라는 외계인을 관찰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SF적인 이야기. 이 두가지 이야기 중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은 후자의 이야기이다. 보통 소설에서는 화자의 '현재'시점이라고 여겨지는 가장 마지막 시간적 맥락이 주도권을 가진다. 소설은 어디까지 '후일담'이다. '미래형 소설'은 일반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가 있는 이상 모든 과거의 이야기는 신뢰도가 가장 높은 화자의 현재 발화 시점으로 종속된다. 따라서 마치 영화처럼 진행되는 헵타포드의 이야기가 현재형처럼 느껴지고 주도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비록 처음에 등장하긴 했지만 과거의 이야기(헵타포드와 전혀 상관 없는 것 같은 딸과의 추억 이야기)가 어딘지 회상적이고 부수적인 이야기 같이 느껴지는 것 또한 작가의 의도이다. 


한쪽은 지나치게 이성적인 것 같고, 한쪽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 같은 이 두 이야기가 마치 물과 기름처럼 느껴지면서도 꿋꿋이 병행하여 진행되는 것은 왜인가. 일반적으로 소설이라면 그 두가지는 결국 맞닿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물리적으로 두 이야기가 섞여가기 시작한다. 자신들끼리만 아는 어떤 농담이나 비밀신호에 대한 이야기. '논 제로섬 게임'이란 단어로 엮이는 두 이야기 사이의 바느질. 샐러드볼. 그러나 진짜로 매혹적인 엮임은 따로 있다. 모든 것을 엮어주는 것, 그것에 그치지 않고 종국에 심지어 여지껏 유지되어 오던 이야기의 현재적 주도권마저 전복시키며 '화자'의 시점 자체를 모호한 어느곳으로 띄워버리는 기교, 바로 헵타포드 B가 그 열쇠이다. 


헵타포드 B가 은유하는 것은 총체적인 세계관이다.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인간의 세계관과 대조적인, 외계인들의 동시적이며(어쩌면 진정으로 시간적인), 시작과 끝의 구별이 무의미한 세계관. 과거와 현재, 심지어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로,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상태로 쓰기 시작하는 문자. SF적인 상상력이 가미된 그 가상의 문자체계로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겪는 선형적 세계의 슬픔이다. 딸이 태어나고, 자라고, 다투고, 감탄하고, 그리고 죽은 뒤에 남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여백이다. 처음과 끝이 명확하게 주어지는 선형적 세계의 비극은 그런 것이다. 추억과 그로 인한 행복은 과거에서만 맴돌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인생에, 철저한 부분집합으로 포함되었다가 떠나간 '너'의 인생은 정말로 이제는 공백만 남은 것일까. 직선은 A와 B 사이에만 존재한다. B 너머에 오직 슬픔만이 존재한다면, 이미 시간적으로 B를 지나친 인간은 어떻게 그 공백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얼핏 SF소설로 보이는 <네 인생의 이야기>는 바로 그 슬픔을 극복하는(혹은 최대화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와 과거, 미래, 그리고 시작과 끝의 선형적인 세계관이 붕괴하는 헵타포드 B의 세계관에서 여지껏 신뢰감을 주던 화자의 자리가 갑자기 모호해진다. 현재로 추측되던 '화자의 자리'는 증발되고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헵타포드 B적 언어로 쓰인 것이라면. 선형적 화자가 사라진 자리에, 선형적 슬픔 또한 사라진다. 기쁨으로 시작하여 슬픔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붕괴되고, 이제 화자는 딸의 죽음의 순간과 탄생의 순간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죽음의 슬픔이 깊은 것과 마찬가지로, 탄생의 기쁨 또한 충만하다. 그렇게 끝나버린 탄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의 마지막(그것은 사건적으로는 과거의 일이지만 소설 내 화자의 가장 마지막 시간이기도 하다)은 그 탄생의 시작을 다짐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SF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가능한 위안의 방식이 아닐 수 있다. 헵타포드 B라는 낯선 개념을 사용한 이 비선형적인 위안법이, 그러나 우리들이 슬픔을 대하는 익숙한 방법들과 닮아있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 비선형적인 언어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울림이 이 SF의 탈을 쓴 소설에 녹아있었다. 헵타포드 B라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는 사실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형식이기도 했고, 궁극적으로 <네 인생의 이야기>의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근사하다, 라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정말 좋은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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