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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9. 2018

[소설] 모래의 여자

'구덩이 속 곤충'

아베 코보

 


책을 읽고 난 뒤, 책 뒤의 해설에 동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경우 그런 해설들이 기대고 있는 것은 텍스트 자체의 에너지가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이 텍스트의 예술사 내에서의 문맥이나 인문학적 지식과의 결합이다. 책의 '의의' 따위를 넣어 적당한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에는 능하지만, 정작 책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모래의 여자> 민음사 번역의 역자인 김난주의 해설에 적극 동의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역자 역시 개인의 경험적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이 묘하게 이 책의 에너지와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이 세상과 모래 구멍 속의 작은 세계. 해석에 대해서 그 이상의 말을 하기보다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다.


초현실


 아베 코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다른 작품을 읽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래의 여자>에 등장하는 '초현실주의'적이라는 속성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모래의 여자>는 서사가 분명한 소설이다. 인물과의 갈등도 선명하고 사건과 긴장감도 익숙한 문법을 따른다. 영화로 만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더니, 이미 영화(Woman in the Dunes, 1964)가 있다.


초현실성이 드러나는 것은 그의 의식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가 바깥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 선명하던 서술이 일그러지며 가독성이 떨어지는 초현실적 흐름이 나온다. 맥락을 알 수 없는 인물들간의 대화, 불쑥 드러나는 이미지들.


그러나 자세히보면 의식의 흐름의 모습을 살찌우는 이미지들이 실은 초현실이 아니라 단지 '비유'에서 온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처럼', '~같은'이라는 말도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모래의 여자>의 발화법에서 사건의 서술을 제외하고 현상에 대한 사유를 하는 대목에서는 거의 여지없이 비유가 나온다. 현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그것을 비슷한 다른 무언가에 비유하는 법이다.


'여자의 유혹은 결국 꿀의 달콤함을 가장한 육식 식물의 덫인지도 모른다. 폭행이라는 추문의 씨앗을 뿌려놓고, 그 다음에는 공갈이란 쇠사슬로 그의 손발을 옭아맨다......'


'신문이 외부와 통하는 창구라면, 그 창구의 유리창은 우윳빛인 모양이다.'


이 소설이 즐겨 쓰는 방식은 이렇게 비유를 위해 동원한 이미지로 카메라를 옮겨 거기서 한 번 더 서술을 진행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면 이야기는 마치 초현실적인 서사가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육식 식물이 씨앗을 뿌리고 쇠사슬을 늘어뜨리는 이미지와, 젖빛 유리의 창구의 이미지. 그러나 비유를 걷고 나면 서술하려는 말은 사실 일반적이고 평범하다. 여자의 유혹은 끌리기 쉬우나 위험하고 구속적이며, 신문으로는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와 같은 서술이다.  


결국 이러한 이미지는 현란하기는 하지만 순수하게 기능적일 뿐이다. 원래 문장을 찾기 위한 암호풀이 정도로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소설이 쓰이던 1960년대 기준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좀 재미를 보기 어려운 미학이다.


<모래의 여자>의 진정한 초현실은 바로 소설의 배경 자체에 있다. 작가의 사유가 가장 집약된 소재인 모래와 고립된 모래 구덩이. 부삽을 이용한 끝없는 노동은 카뮈의 실존적 시지프스 노동을 연상케하며 하늘의 조각이 올려다보이는 모래 구덩이는 하루키 특유의 '우물'과도 닮았다. 여러가지 유체역학적 지식을 동원한 배경 구축은 철저한 리얼리즘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 작은 고립 세계가 주인공한테 기능하는 방식으로 보면 그곳은 완전히 환상적이며 상징적인 '초현실'의 공간이다. 구덩이 위에 존재하는 '현실'과 그 현실을 자꾸 상기하게 만들어 탈출 시도를 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처한 실존적 '현실'. 두 현실 사이에서 비현실은 과연 무엇일까. 그가 자신의 구덩이에 만족하게 되는 순간 두 세계의 현실관계는 어떻게 뒤바뀌는가. 이 소설에서 '초현실'은 차라리 주인공의 '탈현실' 의지에 있다. 그가 발을 딛는 곳은 언제나 '초현실세계'일 것이다.


곤충채집가의 눈


오래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이 소설의 시선은 남성중심적 대상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을 벗어날 순 없다. 그것은 물론 함께 있는 여자를 항상 '쓸모'에 따른 도구로서만 관찰하는 주인공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또한 주인공 자체가 페르소나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그러한 시선은 소설 자체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교무실에서 엽차를 홀짝거리는 동료들'마저 조그만 벌레들 취급을 하는 그(주인공)의 시선은 스스로 인식하듯이 그가 '광각 렌즈를 낀 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철저하게 그가 그런 성격을 가진 소설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라고 알리바이를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언제나 페르소나적 인물을 소설의 주체나, 궁극적으로 작가의 시선에게까지 확장시키려는 시도는 의문의 여지가 생길 수밖에 없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경우가 많고, 또 그것이 작가의 밸런스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목이 <모래의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인물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이건 좀 개인적인 견해다). 여자는 소설 내내 성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고, 맹목적으로 노동을 하려는 기괴한 의지는 '문학적 수상함'이 갖춰져야 하는데, 그렇다기보단 그냥 좀 멍청해보일 뿐이다. 그의 탈출 의지나 폭력적 행동에는 아주 단편적인 반응만 할 뿐이다(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가끔 힘으로 제압하거나). 즉 그녀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깊이'나 그녀라는 인물이 대변하는 사유로서의 '입체감' 같은 것이 부족하다. 유일하게 마음이 끌렸던 것은 '라디오'에 집착하는 소박한(수상한?) 목적의식 정도. '여자란 그런 존재'라는 어떤 불편한 명제가 전제로서 그 후경에 항상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시대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단 한 명의 곤충채집가인 인간과, 자신을 둘러싸고 위협하는 곤충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은 마치 쥬라기 공원과 비슷한 종류의 위기감을 바탕으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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