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그런 것들이 있다. 이미 사람들 사이에 명작이라고 소문난 것들이 정작 내게는 볼 기회가 없어서 큰 의미로 닿지 않던 것들. 그리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너무 이름을 자주 들어서 내가 본 줄로만 알았던 그 작품이 사실은 생소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혼자 그것을 감상하며 오래된 명작을 전혀 다른 시대에 새삼 즐겁게 즐기는 경우. <에반게리온>이 그랬고, <시네마 천국>이 그랬으며, 그리고 <쇼생크 탈출>이 그랬다.
명품
영화에도 '명품'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이런 영화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두 시간이 넘는 긴 플레이 타임 동안 집중력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다. 완만한 경사를 덜컹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랄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주인공이라는 큰 스토리를 천천히 진행시켜 나가면서도, 여러 매력적인 인물을 동원한 서브 플롯들이(그러나 결코 부수적이지만은 않은) 호기심과 흥미를 지속적으로 잡고 긴장과 울림을 유지시켜 나가는 솜씨는빈틈 없고 노련했다.
가석방 신청을 번번히 거절당하는, 감옥 안에서 모든 물건을 구해다 주는 두 번째 주인공 레드.
50년만에 가석방을 받고 사회에 나가 결국 죽음을 택하는, 책과 새를 사랑하던 노인 브룩스.
종신형 수감자들이 가득한 곳에(종신형의 의미가 한참 깊어가고 있는 참에) 2년형을 받고 산뜻한 로큰롤 음악과 함께 등장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움받지도 않는 토미.
캐릭터를 내세운 하나하나의 서브플롯은 그 각자가 나름의 울림과 매력이 있으면서도 결국 메인 플롯에 치밀하게 연결되어 긴밀하게 활용된다. 바느질 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구성력.
현장감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 역시 그 순간만큼은 함께 수감 생활을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언제나 감옥 내부를 비추는 카메라를 따라서 벌레가 나오는 식사를 주는 식당과, 노트만큼 햇빛이 드는 어두운 독방과, 갖가지 수집품이 자리잡은 비좁은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감되어 자유를 잃어간다.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공들여서 관객의 눈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브룩스가 가석방을 받고 나온 사회의 모습은 정말로 정신이 없고, 푸른 태평양에서 한가롭게 보트를 수리하고 있는 앤디의 모습에선 숨이 탁 트이며 거의 비현실적인 자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된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관객들은 레드의 말처럼 그 세계에 길들여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하지만 울리는
잊을 수 없는 세 장면이 있다.
하나는 앤디가 간수를 설득해서 지붕 도색을 했던 그의 동료들이 그윽한 노을 아래서 차가운 맥주를 들이키는 장면.
'우리는 마치 자유인처럼 앉아서 햇빛을 받으며 마셨다. 꼭 우리들 집 지붕을 고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른 하나는 앤디가 턴테이블로 이탈리아 가곡을 교도소 전체에 틀고 모든 죄수들이 가만히 서서 감상하는 풍경을 카메라가 점점 높아지며 비추는 장면.
'그 목소리는 이 회색공간의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마지막은 정말로 '파란' 태평양의 모습을 배경으로 레드가 새하얀 모래를 맨발로 밟으며 앤디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장면.
'태평양이 내 꿈에서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큰 미학적 기교가 없는 단순한 장면이다. 그러나 그 앞에 육중한 비자유의 무게가 걸려 있었기에(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일종의 스톡홀롬 신드롬-간수가 범죄자이지만-적인 최면이 걸린 것 같기도 하다) 그 단순한 몇 마디 말에서 가시지 않는 깊은 울림이 흘러 나올수 있었던 것 같다. 자유니 희망이니 하는 뻔한 주제였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던 것도. 그 육중함이라는 것은 결국 설득력이 아니었을까.
프로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물론 내용이 웃겨서가 아니었다. 구성이 너무 좋았다. 힘이 빠질만하면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사건이 새로운 방식으로 벌어져서 느슨해지려는 긴장감을 유지했다. 오르막길을 가는데 누군가 편하게 뒤에서 등을 밀어주는 느낌. 나는 종종 '프로'라는 말을 연출의 품격과 관련지어 사용하곤 하는데, 수용자가 억지로 고생해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실수나 허점을 드러낼까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 있도록 무언가를 보여주는 연출의 품격, 편하게 앉아서 즐겁게 동의하며 자유롭게 음미하고 영감과 함께 떠오를 수 있는 기회를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작품(혹은 공연)을 접하면 프로, 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헐리우드적인 기본기가 탄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줄 수 있어서 <쇼생크 탈출>은 진정 프로페셔널한 영화가 아닐까. 오랜만에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 인상 깊은 음식은 벌레가 나오는 배식. 뭔지 모를 죽은 인간 본연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거기서 벌레까지 나오다니. 그 벌레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노인이 실은 새를 사랑하여 먹이로 주려는 노인이었다는 반전은 정말 귀여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나라면 저 멀쩡해 보이는 빵만 먹을 거야.'
- 젊은 시절엔 피부가 참 좋았군, 하며 보았더니, 톰 행크스가 아니었어? 뒤적거려보니 나만 이런 착각을 한 것은 아니었나보다. 고질병인 안면인식장애...
- Freeman이라는 단어를 종종 말하는 레드 역으로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이 캐스팅된 것은 우연이 아닐거라는 생각. 어떤 Freeman이 먼저였든지 간에. 그는 내 안면인식장애를 피해가는 몇 안되는 흑인인데, 참 좋아하는 아저씨다. 교육을 받지 못한 것 같은 어수룩함과 또 숨길 수 없는 지적인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그가 레드여서, 그리고 하안 백사장을 맨발로 걷는 것이 그여서 좋았다.
- 딱히 음악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보는 내게 유난히 음악이 귀에 들리던 영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중세 북유럽 스타일의 바이올린 곡이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깔린 것도 귀를 즐겁게 했다.
- 여하튼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던 영화. 좋아하는 것이 다섯 개가 넘어가면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눈이 멀어버리는 모양이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