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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ug 02. 2018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마약과 총과 돈가방. 장르. 그리고 배반.

No country for old man 2007 - 에단 코엔, 조엘 코엔

 





문학에선 '장르 문학'이라 불리는 문학이 있고, '장르'를 이용한 문학이 있다. 


장르성 자체를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는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장르'를 이용한다는 것은 영화 내내 특정한 장르의 형식을 '일부러' 충실하게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혹은 곳곳에서 그 흐름을 끊고 배반하는 것이다. 최종 목적이 장르의 충실한 재현이나 발전이 아니라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전에 올렸던 <7인의 사무라이>와 마찬가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장르적 구성이 있고, 마찬가지로 메시지가 있다. 차이가 있다면 <7인의 사무라이>에서는 장르적 몰입의 기회가 오는 경우에 (사무라이 전투의 멋짐이 드러나는 장면에)그 몰입과 재미를 끝까지 밀고 나가서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한 뒤에, 마치 잊지 않았다는 듯이 인물의 입을 빌려 마지막에 메시지를 후추 뿌리듯이 살짝 얹어 주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이제 막 서스펜스가 일어나려나 싶으면 '흥, 딱히 너희를 위해 준비한 재미가 아니야'라며 츤데레처럼 발을 빼버린다. 우리는 이 영화 곳곳에서 빈 공백을 발견할 수 있다. 거친 총격전이(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벌어져야 하는 곳에 삭제된 시간과, 그저 널브러진 시체들의 전시. 영화에서 필요한 것은 총격전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참혹한 그 결과일 뿐이다. 장르(이 영화의 장르를 나는 '아버지 장르'라고 부르고 싶은데, 영화속 인물이 무슨 마법 비슷한 것을 부리거나 로봇 비슷한 것이 나오는 순간 채널을 돌리던 아버지도, 불꽃 튀는 총격전이 벌어지는 영화에선 리모콘을 조용히 놓는다)는 그저 이용될 뿐이다. 메시지(혹은 발상)가 애초에 있었고, 그 장르가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문제성이 그 메시지를 구현하는데 적합했을 뿐이다. 


이런 경우에, 영화는 장르의 '전형'에 일단 충실하다. 마약과 총, 돈이 든 까만 가방과 도주. 멕시코. 국경. 살인마. 그것들만 배열해놓아도 영화가 알아서 움직일 것 같은 소재들. 본격적 장르 영화라면 관객들이 이미 익숙한 전형에 따르기보다 장르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변주가 더 각광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장르를 '가장한' 영화라면, 오히려 전형을 따른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과 마찬가지로, 지금 관객이 그 장르를 보고 있다는 인식을 강조함으로써 영화와 장르 자체에 비판적 거리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관객들에게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자신이 가진 그 전형적인 소재에 쿨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적 거리를 위해서, 결코 영화의 장르적 재미에 '몰입'해서는 안 된다. 만약 관객들이 영화의 서사적 재미에 몰입할 것 같다가도 종종 끊기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 목적이 성공한 것이다. 


마약과 총과 돈가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 소재들을 한 걸음 떨어져서 낯설게 보기를 요구한다. 도대체 저게 다 뭐길래. 를르윈 모스와 안톤 시거가 적나라한 상처를 열심히 치료하는 모습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배에 구멍이 뚫린 피투성이의 모스가 맥주와 점퍼를 사고 절뚝거리며 멕시코 국경을 넘어가는 장면은 영화에서 꽤나 중요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관객들은 이런 모습들을 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저울질한다. 저 돈가방이, 저만한 일들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돈가방 하나만 있으면 폼나는 총격전의 모자람 없는 이유가 되곤 하던 이 장르에 대해 원초적인 질문을 새삼 던지게 되는 것이다. 저게 다 뭐길래. 


하지만 그 돈가방을 모른척하고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진정한 메시지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이란 나라가 가진 자연재해(와 그 연장선상에 있어서의 '핵')에 대 한 원초적인 공포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란 나라는 누구나 품에 숨기고 있고 사소한 계기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쉽게 죽이는(내가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총'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혹은 마약이나 돈가방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투성이의 참혹한 운명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핸들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본의아니게 말려들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미친놈 하나의 이상한 자기논리 때문에 집 안에 단단히 틀어박혀서 숨어 있더라도 결국은 잔혹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인물들이 들려주는 갖가지 외부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 은퇴한 전직 보안관의 삼촌에 관한 이야기는 그런 개념의 핵심에 가 있는 이야기다. 이 시대에는 누구나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과 폭력에 자기집 현관 앞에서 피를 흘리고 허우적거리며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것. 이유라도 알고 싶은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그저 알 수 없는 '인디언 말' 몇 마디다. 논리가 상실된 시대, 죽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는 시대.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방법 또한 알 수 없는 불가해한 폭력의 시대. 이런 시대에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사실 '노인' 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언젠가 노인이 된다. 오히려 노인이 되길 바란다. 별 탈 없이 젊은 나이에 총을 맞아 죽지 않고, 건강하게 노인이 되어서, 하던 일을 마무리 하고 자랑스럽게 은퇴를 하고, 허튼 짓에 관여하지 않고 조심하며 충실히 산 대가로, 천수를 누리다 눈을 감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그들을 엄습하는 것은 총이든, 암과 같은 병이든, 이해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동전의 논리'다. 먼저 달려간 아버지가 춥고 어두운 겨울 속에서 빛을 밝히고 있는, 그런 정의롭고 안락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꿈에서 깼고, 이곳은 그렇게 무사히 삶의 마지막에 도달하길 원하는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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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미 리 존스를 보고 나는 항상 '갠달프다'라고 생각하는데, 항상 틀린다. <맨 인 블랙>을 보면서도 그랬는데 그 때도 토미 리 존스였다. 안면인식장애가 여전한가보다. 


- 우유는 사랑받는 음식이다. 특히 싸이코한테. <시계태엽오렌지>와 마찬가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인상적인 빌런 안톤 시거는 빈집 냉장고에서 술이 아닌 우유를 꺼내 마신다. 우유는 종종 소년성(남자 범죄자들이니)을 상징하고, 그들이 우유를 마신다는 것은 그런 싸이코라도 결국 사람이고, 소년기에 어떤 불충족이 있지 않았을까, 온정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대하게 만드는 장치다. 즉 싸이코의 인간성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갈고리의 역할인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그런 단서는 나오지 않는다. 안톤 시거는 그냥 우유를 마실 뿐이다. 유유히. 


- 인상적인 소도구로 산소탱크가 있다. 이 영화의 유니크함이 가장 돋보이는 도구인데, 살인 방법의 기발함 외에도 이 도구는 문고리를 따는 데 쓰인다. 평범한 시민이 어디에 숨어 있더라도, 무작위 폭력으로부터 결코 숨을 수 없다는 암시. 그런 세계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무화시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 근처에서 항상 떠돌고 있는 산소. 안톤 시거라는 독특한 악당의 정체성은 거기서 나온다. '도망칠 수 없다.'


- 를르윈의 콧수염 멋지다. 브래드 피튼줄 알았네. 안면인식장애 추가.


- 모든 행운에는 피의 댓가가 뒤따른다!! - 라는 부제.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행운을 피한다고 피를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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