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료시카, 너무나 많은'
소리, 시선
시작이 좋았다. 남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인디아가 겪는 세계를 직접 관객도 겪어보라고 하는 것처럼, <스토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들여서 예민한 소리를 구현해놓았다. 덕분에 관객들은 거미가 기어디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주체가 되어 인디아의 삶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커다란 와인 잔 안에 맴도는 숨의 소리까지 표현한 것은 그 새로운 주체의 상상할 수 없었던 디테일이었다). 그것은 단지 소리에 좀 예민한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먼 곳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없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 자신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이는 소리까지 모두 듣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스토커> 연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카메라 워크의 인기척이다. 본래 카메라는 가상의 시점을 전제하므로 흔들리거나 목적성을 보이는 등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인기척을 낸다. 누군가 걸어가는 것처럼 흔들리고, 먼 곳이나 문 뒤에 숨어 누군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고의적인 표현을 한다. 살인마가 지켜본다는 것을 암시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 카메라의 시선(사실 이런 연출은 스릴러에서 자주 볼 수 있긴 하지만)엔 또 다른 암시가 하나 숨어 있다. 나를 숨기고, 내가 있는 것을 모르는 대상을 '감시'하는 것('스토커'의 이중적 의미 중 하나).
<스토커>의 인물들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인디아와 찰리와 이블린 세 사람은 나머지 두 사람이 자신이 없는 곳에서 뭘 할까 항상 의심한다. 또 세 사람이 각기 서로를 경계한다(이블린은 후반에 찰리를 경계한다). 둘이서 있을 때의 행동을 누군가 듣고 있다가 불쑥(그러나 우연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튀어나와 간섭하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빈번하게 나온다. 그들은 블라인드를 치고, 문을 닫고, 한 명을 지하실로 보내기도 하며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지만, 결국은 계단 위에서, 창문 너머에서, 그리고 마루 밑에서 서로를 감시한다. 그것이 가장 절묘하게 연출된 장면이 바로 서로 통하는 방에 따로 문을 열고 들어간 이블린과 찰리가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카메라가 있는 곳은 물론 하나 남은 감시자 인디아의 시선을 의미한다. 이블린은 곧 방문을 닫는다(그러나 찰리와는 통하고 있다). 찰리는 이블린과 대화를 하면서도 인디아로 향하는 문을 열어둔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이자 자신의 욕망을 가로막는 존재인 딸 인디아에 대한 거부의 표시이자,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스토커 가문의 어떤 비밀스러운 욕구를 인디아와 공유하려는 찰리의 심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숨김'을 넘어서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두 스토커의 특이한 청력과 시력(물론 찰리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유리 너머에서 가위로 싹둑싹둑)은 이 영화에서 특히나 특별한 능력이다. 그것은 '잠긴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다. 그들에게 '숨김'은 있을 수 없다. 평범한 인간인 이블린은 제쳐두고서라도, 살인의 쾌감과 감시의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두 스토커들 사이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시종일관 서로에게서 숨기고 닫으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자물쇠와 문은 열린다. 숨길 수 없는 욕망들이 드러난 자리에서, 결국 불이 타고, 총성이 울리고, 피가 흐른다. 이제 진정한 자신의 마지막 자물쇠마저 열어버린 인디아는, 열쇠를 목에 걸고 어디로 향할까.
마트료시카, 너무나 많은
장점은 언제나 단점이 될 수 있다. <스토커>는 분명 매력적인 장치를 많이 사용한 작품이다. 그러나 모든 장면이 특별해보이기 위해 애를 쓴 티가 난다면, 왠지 질식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들기 마련이다.
인디아는 특별한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동원된 여러 표현들은 오히려 그녀를 '나는 특별해'라고 발버둥치며 소리치는 듯한 캐릭터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버렸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지하실 장면은 분명 매력적이었지만(전등을 흔들며 지나가는), 그녀가 굳이 '장례와 애도의 백과사전' 따위를 읽는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데 이르자 조금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침대에서 무표정하게 허우적거리는 장면은 물론 마지막에 동생을 묻어버린 찰리의 일화와 연결되며 다소 괴기스러운 기분이 들게 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영화의 모든 특이하고 괴기스러운 연출들은 기껏 의미부여를 해봐야 그저 1:1로 연결되는 변사(辯士)체의 해석이 하나 따라붙는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랬던 것이었다). <몽상가들>을 보며 특이해 보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의 안쓰러움을 부담스럽게 느꼈던 터라, 이런 느낌의 맹목적인 특이함 추구는 개인적으로 호감이 가질 않았다.
어릴적부터 생일날마다 한 켤레씩 받아온, 점점 사이즈가 커지는 옥스포드화를 쭉 늘어놓은 모습을 보며 나는 마트료시카를 얼른 떠올렸다. 그것은 꽤나 긴 시간을 요구하는 장치였다. 18년에 이르는 동안 조금씩 커지는, 그 거꾸로가는 마트료시카의 끝에 나온 것은 까만 하이힐이었다.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찰리의 생각에는, 세상에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스토커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인디아 뿐이었을 것이다.
그 난데없는 사랑(결국 마지막에 총알이나 맞게 될)의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의미심장한 마트료시카를 끈기를 가지고 열었더니, 결국 마지막에 더 이상 열리지 않는 작은 마트료시카 막내와 하나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냥 그들의 진정한 본성은 싸이코패스 들이니까, 거기서 이해를 끝내야 할까? 그들의 몸 속에 흐르는 피가 단지 그럴 뿐이니까? 눈 앞에서 건장한 남자의 목이 툭, 하고 꺾이는 것에서만 성적 흥분이 되니까? 거기엔 더 이상의 상상의 여지가 없었다. 아, 걔들은 그렇구나. 그들은 굉장히 괴기스러워보이기는 하지만, 스크린 밖의 나를 위협할 어떤 공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하얀 꽃에 피를 뿌린, 엄마의 옷과 아빠의 벨트와 삼촌에게 받은 구두를 신은, 마지막 한 조각의 '더 이상 열리지 않는' 한 인형을 바라보며, 너무나 많은 마트료시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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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이 나온다. 멋쟁이 찰리가 요리를 했고, 두 여자는 맛나게 그걸 먹는다. 그런데 그건 그냥 하나의 소품에 불과했다. 알콜솜과 같은. 식욕이 전혀 들지 않았다.
- 특이함을 위한 특이함. 그렇게 보였다.
- 별개로, 끈질긴 '소리'의 연출은 인상적이고 즐거웠다. 분명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 이블린은 영화 전체에 걸쳐 대단한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두 괴물 사이에 낀 바보 정도의 캐릭터로 끝나고 말았다.
- 이상하게 요즘 본 영화들에서 보안관이 자주 나오는 것 같네...
- 한국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한국인 감독의 영화. 편견이 생겼을까. 혹은 전혀 실감하지 못했을까. 보는 내내 그 감각과도 싸웠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 나중에는 그냥 하나의 덩어리처럼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