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담배, 소파, TV, 조명, 탁자, 자물쇠'
감독의 이름을 먼저 듣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홍상수가 특히 그랬는데, 요즘 들어서는 왕가위를 자주 들었다. 여기저기서 그의 이름을 들은 것이 네 번 정도 되었을 때, 이제 슬슬 그의 영화를 봐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경우에, 나는 고유명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작가, 감독의 이름들. 심지어 작품의 제목까지도. 작가나 감독의 이름 자체는 작품과 관계될 수 없는 우연한 요소들이고, 같은 사람이라도 어느날 전혀 다른 맥락의 작품을 만들 수가 있다. 게다가 창작자 한 사람이 그 작품의 모든 것을 장악할 수도 없다. 자신만의 개성으로 유명한 스타일리쉬한 감독이나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마치 처음 보는 작품처럼 의심하며, 오직 그 작품 하나만으로 작품의 내용을 말해야 한다는 지론이 있어서, 감독의 이름 하나만으로 작품의 내용을 이미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별로 반기지는 않는다. 감독이 뭘 하던 사람인지, 그가 뭘로 유명하고, 또 그가 정치적으로, 예술적으로, 성적으로 어떤 성향이 있는지 같은 외부적인 맥락들을 지금 눈앞의 이 '작품'을 이야기하는데 끌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나는 이름들이 있다. 그럴때 나는 '지문'을 생각한다. 작품을 만지작거릴 때 지문이 유달리 많이 묻는 사람들도 있지, 라는 식으로. 뭐, 박민규나, 김애란이나,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하루키나, 그런 사람들.
왕가위는 어떨까. 다행인 것은 내가 아직 그의 작품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정보는 그냥 그 이름이 영화사에 있어서 유명하다는 것. 아마도 추측하기로, 그도 그런 식으로 지문이 많이 남는 사람은 아닐까 하는 것. 그런 생각들도 막상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다 사라진다. 잡다한 생각들은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웅장하게 흐르는 이과수 폭포 깊은 곳으로 다 떠내려가버렸다.
좋았던 것
글쎄, 나는 이 영화는 이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먼저 좋았던 것.
아휘의 귀걸이. 언젠가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하면 게이의 증표(?)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뭐 그 말의 신빙성은 제쳐두더라도, 아휘의 귀걸이는 뭔가 사람을 달라보이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얀 삼각 팬티에 반삭의 머리. 어디서 많이 본 조합이다. 군번줄 같은 목걸이까지. 아무리 봐도 어딘가에서 국방을 수행하고 있는 촌스러운 모습의 아휘가 뭔가 그런 종류의 것과는 달라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 귀걸이 하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흑백 화면에서도, 컬러 화면에서도 종종 카메라에 잡혀 반짝, 빛나고 있는 그 귀걸이가 묘하게 좋았다.
아휘의 샌드위치. 바 입구에서 안내인 역할을 하다가, 벽에 기대어 우적우적 혼자 씹어먹는, 종이에 싼 그 햄 샌드위치의 맛이 문득 내 입안에서 느껴졌다. 나는 그 맛을 알고 있었다. 해외 여행을 하면서, 첫날에 '어 샌드위치다!' 하며 익숙한 느낌으로 주문하지만 어딘가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다른 짭쪼름한 맛과 향의,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낯선 나라의 샌드위치. 그러나 여행의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종종 식사가 마땅치 않을 때마다 찾게 되는, 이제는 여행의 일부가 되어 익숙해져버린 그런 샌드위치. 아휘는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이제 '여행'이 아닌 '생활'을 하고 있다. 낯선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온전한 실루엣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황색 물감 위에 떨어진 선명한 까만 물감 한방울처럼, 이국 땅의 배경과 동화되지 않는 자신의 몸의 실루엣의 경계가 너무나 날카롭게 느껴져서, 나는 어쩐지 그가 물고 있는 그 햄 샌드위치의 맛을 알 것만 같았다. 그 경계는 아휘가 영화의 마지막에 대만에 도착했을 때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는 이제 배경과 따로 구분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긴장이 풀렸다. 알게모르게 날카로운 그 실루엣으로 인해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 혹은 아휘가. 아마도 감독과 같은 국적의 사람들은 더욱 그 차이를 강하게 느끼겠지. 이제 긴장을 풀고 배경에 동화된, 조금 달라진 표정의 그는 삶의 어느 순간 문득 그 맛을 기억하며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익숙해진 낯섦.
그리고 아휘의 방. 영화의 대부분의 무대가 그 방이었다는 점이 좋았다. 침대와 소파, 유화같은, 인상적인 벽지의 색감과 TV가 눈에 들어오는 그 방의 모습을 보며 고흐의 방을 떠올린 것은 분명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놀랍게도 그 두 방은 어딘가 닮았다(하나하나 따져보면 다르겠지만). 그 방 어디엔가 보영의 여권이 숨겨져 있고, 쌓아놓은 담배가 있고, TV에서는 낯선 나라의 언어가 흘러나오고, 소파는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볍고, 조명은 오렌지색이고, (침대에 이가 있다는 것은 좀 별로고), 자물쇠는 소용이 있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고. 공용 식당에서 만들어 온 따끈한 요리가 올라가기에 충분한 작은 탁자도 있고. 아휘는 보영의 손이 빨리 낫지 않기를 바랐다. 늘상 티격태격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곳은 행복한 시간이 잠시 고여 있는 곳이고, 그곳에 있는 동안 만큼은 비행기 값이든 뭐든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니까.
별로였던 것
그래, 별로였던 것들도 있다. 먼저 이구아수 폭포와 그 스탠드. 막연한 장치였다. 막연한 목표. 막연하게 그리는 행복. 사실 1997년의 시점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너무 쉬운 클리셰였다. 언젠가, 이구아수 폭포에 함께 가자. 그런 것. 언젠가 함께 타워에 가자, 라고 했던 내 옛날 소설을 무척 생각나게 해서 더욱 그랬다. 좀 별로였지 그거.
하얀 런닝셔츠. 그냥.. 뭔가 몰입이 힘들게 만드는 것..
창. 아휘와 보영의 사이에 등장하여, 애매한 삼각형(애정 관계가 아니라)을 그리게 만든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그의 캐릭터는 뭐랄까, 아르헨티나에서 살아가는 두 홍콩인 사이에 불쑥 나타난, 일본인 청년 같았다. 일본 영화에서 볼법한 설정과 장치들을 묘하게 혼자서만 잔뜩 두른 것 같은. 보영과 또다시 틀어진 아휘가 창과 관계를 맺는 시나리오로 갔다면 너무나 뻔한 클리셰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식으로 흐르지 않았다고 해서 어떤 여운이 있었을까. 기왕에 그의 나레이션도 등장할 바에야 차라리 다중 시점으로 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고, 결국 이것은 아휘의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왜? '창'이라는 캐릭터의 존재가 유달리 사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성도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영.
공감하지 못했던 것
결국 이 영화가 크게 와닿지 않은 것은 내가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있다가, 헤어지고, 또다시 함께 있고, 견디지 못하고 헤어지고.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이 모든 것인데도. 그냥 이것은 경험적인 문제였다. 누군가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몹시 공감했을 지도 모르겠다. 보영이라는 인물과 또 그런 보영을 놓지 못하는 아휘를. 나는 그들이 아니었다. 굳이 공감을 할 수 있다면 창이라는 인물일 것이다. 두 사람과는 전혀 상관 없는 자신의 여행을 하던 중에 아휘를 만난다. 전화를 거는 목소리를 멀리서 듣고 그가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그가 슬프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만취한 아휘를 방으로 부축해 데려가면서도, 그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과는 상관 없는 자신의 여행을 멈추지는 않는다. 세상의 끝에서 녹음기를 켜지만, 녹음된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그 때의 그 표정. 창의 표정과 아마도 똑같은 표정으로, 나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 음식이 무척 많이 나오는 영화였고, 나는 그것이 몹시 좋았다. 역시 홍콩인이야. 물론 그 중에서도 최고는 종이에 싼 햄 샌드위치였다. 그것을 사소한 마트에서 산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 장국영을 처음 보았다. 양조위도. 이렇게 생겼었구나. 그런데 두 사람을 한번에 보았더니, 그리고 아휘를 먼저 보았더니, 자꾸 아휘의 모습에 장국영이라는 이름이 겹친다. 처음 보는 존재를 어미로 인식하는 새끼 오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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