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시간대의 두 이야기'
왕가위의 영화는 두 번째다.
고작 두번 본것만을 가지고 성급하게 말해보자면 왕가위는 수화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플로피 디스켓 모양의 '저장' 아이콘과 함께 요즘 아이들은 그 유래를 모른다는 수화기 모양의 통화 버튼 아이콘. 누군가와 헤어지면서 '전화해~'라고 말하며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펼쳐 귓가에 대고 흔드는 것이 더 이상 상형문자적 기호가 되지 않는 시대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댄 채 수화기에 대고 한참을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223(경찰 하지무)의 모습이 익숙하고 반가우면서도 묘하게 낯설게 느껴진다. 아직도 머릿속에서는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모습처럼 생각되지만, 어느샌가 우리 주변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져버린 그 풍경. <해피투게더>의 아휘도 무척이나 수화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또 왕가위는 방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의 생활이 고스란히 고여 있는 곳. 아무렇지도 않다는 무심한 생활습관 속 어딘가 외로움이 슬며시 스며들어 있는 곳. 그리고 그곳에 새롭게 깃드는 한 사람. <해피투게더>의, 고흐의 방을 닮은 아휘의 방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처럼, 663의 방도 묘한 매력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고개를 바닥까지 낮추면 보이는 방의 창문. 조금 지저분하긴 해도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도록 투명하게 방을 비추는 하얀 햇빛. 넘치는 물. 그곳에서 피우는 담배. 그리고 캘리포니아 드림.
두 점이 찍히면 그때부터 직선이 생긴다. 겨우 두 편을 본 것만으로도 왕가위라는 어떤 직선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했다. 성급한 내 생각에 의하면, 분명 <해피투게더>보다 <중경삼림>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카우보이 비밥>
어쩐지 상대적으로 비중이 좀 낮은 것 같은 첫 번째 이야기를 보면서, 와타나베 신이치로의 <카우보이 비밥>이 무척 떠올랐다. 멀끔하게 잘 생긴 마이페이스의 스파이크와, 어딘지 수상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줄리아 두 사람의 이야기처럼, 경찰인 223과 마약밀매업을 하는 그녀(이름이 나오지 않는다)의 이야기는 느와르 스타일로 쿨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있다.
사실 첫 번째 이야기는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일단 프로답지 않게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들이 좀 눈에 거슬렸다. 인도인의 아이를 그렇게 쉽게 납치해서 인질극을 벌이지 않나(멀리 간 것도 아니고, 근처 인도인 커뮤니티를 조금만 수소문해보아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이힐을 신고도 건장한 남자들의 전속력 추격을 한참을 피하며 결국 따돌리지를 않나. 거기다가 가끔 등장하는 '유통기한이 없는 건 없는 걸까?'라는 오그라드는 자문은 또 어떤가(뭐.. 1994년도 작이니 이해할 수 있을 지도).
그래도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면 223이 자신의 넥타이로 그녀의 하이힐을 닦는 장면.
넥타이와 하이힐은 의미심장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이다. 그것들은 둘 다 남성과 여성에게 신체적 제약(목이 졸리고, 걸을 때 힘들고)으로 작용하면서도, 굳이 그런 제약을 감수하고 착용하여 현대의 어떤 세련된 문명에 기꺼이 포섭되어 있음을 알리는 징표다.
원래 하이힐은 달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발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마약을 중간에서 가로채 잠적한 인도인들을 쫓고 또 그들에게 쫓기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그 와중에 '순수한 미적 기능'을 정체성으로 하고 있는 하이힐은 원래의 기능과는 동떨어진 작업(오히려 자신이 틀림없이 방해가 될 그 작업)을 하느라 무척 더러워졌다.
넥타이 또한 무언가를 닦기 위한 걸레로 쓰일 수 없는 물건이다. 그것은 어떤 남성이 야성을 버리고 문명적 질서에 제대로 포섭되어 있다는 안심(실제로 그러한지와는 별개로)을 주기 위한 선물 포장용 리본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어쩌면 가장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할 그 무쓸모한 의복이 지금은 신발을 닦는 헝겊조각이 되어 스스로 더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그녀에 대한 223의 애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한 가지 더 알려주고 있는 것이 있다.
본래의 기능(문명적 질서에 순순히 포섭되어 있다는 징표로서의 기능)을 잃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 물건들은 오늘 밤이 조금 특별한 밤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마약상을 잡아야하는 경찰인 223과 마약밀매인인 그녀가 0.01cm의 간격으로 스치는 그 밤은, 그들이 원래 해야할 일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223이 실연을 받아들이기로 한 마지막 날이기도 하며, 쫓고 쫓기는 삶을 살아온 그녀가 선글라스와 하이힐도 벗지 않은 채 처음 만난 남자의 곁에서 마음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예외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여태까지의 삶에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쳤다. 실연과 배신. 하지만 그들은 다음으로 나아가야한다. 여태까지의 일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다음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조금 특별한 그 밤'이다. 인생의 4분의 1지점을 도는 반환점을 지나고 생일을 맞게 된 223은 '한 여자'로부터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기한이 없는 통조림처럼 간직한다. 이제 이정표처럼 그 새로운 말을 소중하게 지니고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녀 또한 복수를 깔끔하게 끝내고 복잡하게 꼬였던 일들을 마무리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갈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날 밤에 스쳤던 그 남자를 마찬가지로 기억할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
두 번째 이야기를 보며 떠올랐던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다. 주인공인 페이(아마도 나는 페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일 것이라 생각한다)가 내 상상속의 '미도리'란 캐릭터와 무척이나 겹치는 것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머리 긴 옛 애인과,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새로운 썸녀(?)란 구도도 선명하고.
조금 심심한 듯 흐르던 이 이야기가 별안간 내게 와닿았던 순간은 바로 페이가 처음 경찰 663의 집에 침입했던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온 663이 '너 온 거 다 알아'라며 집안을 뒤지기 시작하고(종종 우리는 불 꺼진 집에 혼자 살금살금 들어가며 혼자서 그런 말을 내뱉곤 하지 않았는가), 정말로 그곳에 숨어 있던 페이는 그의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숨기고.
몽유병이라고 했던가. 어떤 꿈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고 했던가.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두 사람의 상상이 겹치는 시간. 언제부터 현실로 바뀐 것인지 모르는 몽상. 비현실. 그러나 그들의 진심.
꿈이란 단어엔 두 가지 뜻이 있다. 밤에 잠이 든 사이 꾸는 환상과, 나중에 이뤄지기를 원하는 무언가. Dream이란 영단어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가 결국 '꿈이란 현실과 소망의 타협'이라는 식으로 그 둘의 연결성을 밝혀내기는 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는 꿈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 둘 사이의 공통점, 어쩌면 그 두 가지가 실은 하나의 개념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페이가 그의 집에 숨어 들어가 청소를 하고 물건들을 조금씩 바꾸는 그 시간들은 정말로 꿈이었을까? '어떤 꿈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고 스스로 말했듯이, 그것은 정말로 모두 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몽상 위를 두 발로 걷는 감각을 알고 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푹신하고 몽롱한 감각이 아니라, 단단하고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를 구두를 신고 또박또박 걷는 듯한 선명한 감각을.
우리는 언제나 상상을 한다. 또 꿈을 꾼다. 현실적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가장 세속적인 인간이라도, 내일의, 어쩌면 10초 뒤의 어떤 순간들을 꿈꾸고 감각한다. 그것을 감각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눈앞의 현실을 깜빡깜빡 잊어버린다. 알싸한 총각김치로 젓가락을 뻗으며, 입안에 든 밥과 고등어의 맛을 잠시 잊는다. 때때로 소망은 그저 감각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이 된다. 현실'감'이라는 말처럼 현실이란 사실 감각의 장난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상상의 시간을 이루는 질료들의 질감은 선명하다. 페이가 몰래 숨어든 경찰관의 집. 하얀 햇빛이 선명하게 들어오는 화장실(틀림 없이 창문이 열려 있겠지). 구정물로 가득 찬 플라스틱 통. 그 안에 둥둥 떠 있는 담배꽁초. 조금씩 금붕어의 수가 늘어나는 수조. 거기에 빠뜨린 플라스틱 비행기. 금붕어가 들어간 물봉지. 그리고 갑자기 마주친 남자.
몽상은 언제부터 현실이 되었던 것일까. 그러나 어째서 진짜 현실이 되지는 못했던 걸까. 너무나 쉽고 자연스럽게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고구마처럼 답답하게 진행된다. 뭐 서로 간에 정리해야할 어떤 감정이나 일들(옛 애인에 대한 감정이나 진로)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차피 사귈 거, 남들 눈에는 이어질 것이 뻔한 관계가 그래, 당사자들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마주친 월남쌈처럼 난해하고 조심스러울 수도 있겠지. 결국 다시 찾아온 페이와 장사 수완 좋은(이 케밥집 주인 아저씨가 많은 것을 살렸다) 아저씨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은 경찰관의 관계가 어떻게 흐를 지는 짐작은 가지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마 생각했던 것처럼 되었겠지.
그래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시 이 이야기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그 몽상과 현실의 경계 어딘가에서 걸어다녔던 그 장면들이었다. 비현실적 숨바꼭질과 귓가에 울리는 캘리포니아 드림. 수조의 물과, 바닥에 넘치는 물과, 샤워기에서 뿌리는 물 때문인지 어딘지 촉촉하게 느껴졌던 낮의(첫 번째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게) 시간들. 완전한 현실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은 현실이 채워줄 수 없는 그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 의족처럼 지탱하며 살아간다. 그 상상력이라는 것들은 의외로 꽤나 단단해서,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는 의족으로 틀림없이 분명하게 땅을 밟으며 걸어가곤 한다. 설령 그것이 정말로 노련하고 근사한 판토마임이라고 해도.
(이미지 출처: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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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상상력이 지나치면 의족을 넘어서서 좀 사이보그처럼 변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 음식이 풍성하게 나오는 영화가 좋다. 식욕만 자극하는 것에 그쳐도 불만은 없지만, <중경삼림>처럼 음식이 풍부하게 나오면서도 그것들을 서사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이용하는 작품은 드물다. <해피투게더>에서도 느껴지긴 했지만 이 영화에서 음식을 다루는 솜씨는 무척이나 뛰어나다. 노골적으로 이용된 파인애플 통조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를 재워놓고 혼자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샐러드와 감자튀김이라든지, 663이 근무 중 노상 테이블에서 먹는 돼지고기 덮밥(?)이라든지, 집에서 혼자 먹는 정어리 통조림에 라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음식에 있어서는 정말로 보물같은 영화다.
- '캘리포니아 드림'이라는 장치는 또 너무 노골적이게 도드라져서 촌스러워 보이기는 했다. 마치 <해피투게더>의 이구아수 폭포 처럼. 그들의 '꿈'은 '캘리포니아'에서만 이룰 수 있었을까.
- 내 안면인식장애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은데, 양조위를 한참을 주성치로 착각을 하며 영화를 봤다. 역시, 일부러 웃긴 짓거리를 하지 않으면 이렇게나 진지한 표정이구나, 하며. 심지어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양조위와 주성치의 사진을 번갈아보면서 헷갈려했다. 정우성과 장혁을 구별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는데. 양조위와 친해질 필요성이 좀 있는 듯.
- 페이를 보면서는 안영미 생각이 났다. 할리라예...
- 페이가 'Eyes On Me'를 불렀더니, 세상에. 어릴 적 mp3에 한동안 넣고 다녔던 그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