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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08. 2019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낭만적인 다짐'

Hiroshima, Mon Amour 1959 - 알랭 레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 것도 못 봤어."


영화의 첫 대사를 들으며 나는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무 것도 못 봤다. 익숙한 말이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가 생각났다. 그것은 같은 감독의 2012년 작품이었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1959년작이다.  


53년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그 질문이란 무엇일까. 그걸 간단하게 '이해'라고 부르고 싶다. 누군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알랭 레네는 그 긴 시간 동안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못 봤다고.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 


이 영화는 히로시마 원폭 사건을 원경에 걸어두고 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로 가공할만한 피해를 입힌 상징적인 사건이다. 죽은 것은 대부분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민간인이었을 것이다. '상징적인 사건'.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그러나 당사자들은 다르다. 그것은 비유나 상징 따위가 아니라, 현실이고 체험이다.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영화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보고, 박물관에 가서 전시된 참상을 돌아 본다고 해도, 여전히 그것을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당신은 여전히 살아있지 않은가.


그것은 일본인 남자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여자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전쟁과 사랑, 프랑스인과 독일인. 지하. 느베르. 그 자신이 그녀의 죽었던 애인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여전히 그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녀가 간호복을 입고도 히로시마의 아무것도 치유할 수 없는 것처럼, 그도 그녀가 어느날 자전거를 타고 떠난 여름밤의 향긋함을 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둘 사이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엔 망각이 있다. 보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 누구나 눈을 감는다. 시간은 흐른다. 그러면 보았던 것은, 아무리 선명했더라하더라도, 결국은 망각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우리는 망각에 저항할 수 없다. 그 어떤 비극적인 사건도(우리는 그런 사건을 많이 알고 있다), 망각을 피할 수는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통은 지나가지만, 동시에 잊혀진다.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래서 죽음을 피할 수도 없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망각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새로 찾아올 행복도 고통도 결국엔 잊혀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를 피한다. 남자는 여자를 끝까지 따라간다.


잘랐던 머리가 다시 자라나고, 폐허 사이에서 벌레들이 나온다. 어느날 지하실에서, 햇빛과 함께 굴러온 유리구슬에 입술을 대고, 그녀는 정신을 차린다. '치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의 안에서 삶만큼이나 죽음은 여전히 계속된다. 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망각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자신의 발가락부터 뜯어먹기 시작하는 육식동물을, 산채로 잡아먹히고 있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는 것처럼.


둘 사이에는 사랑이 있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그렇다, 사랑이 있다. 망각의 대상은 고통 만이 아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이 히로시마인지, 남자인지, 혹은 '대상' 그 자체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마지막에 남자를 '히로시마'라고 부른다. 그것은 육체를 가진 한 개인이 아니라 역사와 고통, 나라, 그것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대상' 일컫는 말일 것이다. '히로시마'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대상'을 '이해'하겠다는 말이다. 그 사이에 시간과 망각이 있더라도, 망각을 피하려 발버둥치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말이다. 그녀가 그를 보고 '히로시마'라고 선언하는 것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 남자를 또 하나의 거쳐갈 개인인 누군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모든 것, 나라와 역사와 고통을 모두 간직한 그 무언가로 보겠다는 것이다. '느베르'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본 뒤라서 그런지, <히로시마 내 사랑>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는 인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어떤 인식이나 숙고라기보다는 하나의 낭만적인 다짐처럼 보였다. 그런 다짐 이후에도 알랭 레네는 여전히, '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물론 <히로시마 내 사랑>이 끝나기 전에 무언가를 '보았다'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 질문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오직 '죽음'의 영역에서만 '이해'라는 것이 가능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닐까. 사실 그것도 '답'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긴 하지만. 어쩌면 그는 애초에 답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결코 눈을 돌리지 않고, 불가능한 인식의 끝까지 달리는 것을 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53년이란 세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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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상수의 영화 <다른나라에서>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국적이 프랑스라는 것까지. 


- 프랑스의 시골마을을 회상하면서 배경으로 일본의 음악과 소리가 계속 깔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현재상태일 터였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해서 하나로 합쳐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히 독립적인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강물과 다리, 그 위로 흐르는 일본 음악. 그런 묘한 중첩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 맥주를 마시기는 한다.


- 아주, 아주 재미가 없었다.


- 잠이 들 것도 같다가, 벼락같이 후려치는 불꽃 싸다구에 나도 잠이 번쩍 깼다. 그거 굉장히 이상한 장면이었다. 


- 퍼레이드에서 인파를 거스르고 올라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꽤나 상징적이었다. 사르트르의 '연루'의 개념이 생각났는데, 세계의 정치적 상황의 영향력에서 온전히 벗어나 둘 만의 독립적인 사랑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직접적이어서 마음에 드는 장면은 아니었다. 


- 사건과 가해자와 피해자. 그 복잡한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요즘의 상황도 상황이니.   


-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의 제목만 알고 있던 시절, 나는 '오겡끼데스까' 뭐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었다.


- 남자의 모습이 정우성과 자꾸 겹쳤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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