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그리고 영화'
다큐멘터리, 그리고 영화
영화를 보러 가기 전부터 들었던 생각이다. '다큐멘터리-영화'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장르를 이미 확정된 단어로 발화하는 지금의 세계에는 물론, 이미 준비된 영화사적 대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으로서 직접 보게 되는 우리에겐, 그것은 무엇일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어떤 단면들을 포착하여 최대한 왜곡 없이 유지하려는 마음가짐과, 그것을 특정한 시선 아래 엮어 일종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의도를, 우리가 하필이면 '스크린'으로 보게 된다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에까지 논의를 확장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군>이라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마음 속에 들었던 지우지 못할 질문은 그것이었다. <김군>에서 '영화'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의 기본적인 서사(그것을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면)는 이렇다. 지만원에 의해 북한군으로 규정된 사진 속 인물은 넝마주이 출신 시민군 '김군'이었고, 그를 아직도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 앞에서 당시에 계엄군에 의해 총을 맞고 죽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한 사실을 연이은 인터뷰를 통하여 천천히 밝혀내는 것.
해변에서 바늘 찾기 같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이 진실을 향한 여정은 긴 노력 끝에 결국 어딘가에 가 닿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부당하게 죽거나 다치고, 가족과 동지를 잃고, 아직도 상처를 지니고 입술을 떨며(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정당성을 위하여 왜곡과 선동을 통해 그 상처를 헤집어놓는 뻔뻔하고도 징그러운 인간들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사실 '2019 새롭게 목도하게 될 5.18'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가 결국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지 알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게 될 사람의 대부분은 어차피 5.18이 전두환을 비롯한 계엄군의 폭거에 저항한 광주 시민들의 저항 운동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일 것임에 분명하다. 그들이 목도하게 될 것은 5.18에 대하여 이미 기존에 가지고 있던 윤리적 관점의 '재확인'일 것이다. 그리고 정작 이러한 내용을 받아들이고(아마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자신의 세계관에 의문을 가져야 할(했으면 좋겠을) 사람들은 보지 않을 것이고, 본다고 하더라도 허튼 소리나 '감정에 대한 호소' 정도로 여기고 말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증언'에 의한 것이고, 그것에 어떤 감정이나 인간적, 심리적인 착각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는 논리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므로.
'스크린'이란 그런 것이다. 애초에 TV 다큐멘터리였다면 스쳐가는 채널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발품과 돈을 들여야 한다는 과정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그렇기에 결국 특정한 관객을 상정할 수밖에 없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의 '다큐멘터리적 의의'나 '기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크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 역시 특정한 윤리적 관점을 '재확인'을 했고, 소수의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예술 작품의 '기능'이란 것은 현대적 관점에 있어서 얼마나 허망하고 무용한 말인가.
영화가 끝난 뒤 감독과의 대담에서, 감독인 강상우는 이 영화가 지만원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한 (팩트체크적)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영화 속 지만원이 보여준 객관적 분석 방법의 노력을 이 영화가 하고 있는가, 신빙성 떨어지는 증언이나 기억을 근거로 감정에만 호소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한 관객의 질문에 반박적인 대답을 하는 과정에 나온 말이었다. 그 관객은 그 때문에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적'이라기보다는 '영화적'이라고 했다. '영화적'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허구적(비객관적)' 혹은 '의도적'이라는 말이다. 지만원의 객관적 분석 방법(그림판)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서, 나는 감독의 말에도, 그 관객의 말에도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먼저 감독의 주장(혹은 의도)과는 달리,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적인 동력은 지만원의 주장(사진 속 광수1호는 북한군이다)에 대한 서사적 반박(그는 광주 시민 '김군'이다)에서 나온다. 그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나 추리물 같은 장르적인 진행력을 가지고 영화의 전반적인 '동선-서사'를 이끌어나간다. 비록 마지막에 그들의 사건 이후의 삶이나 그때와 지금 그곳의 풍경의 간극을 말하고자 했다는 어떤 지향점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영화 <김군>이라는 작품 자체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내적 동력은 결국 '김군을 찾는 여정'이다. 그가 결국 총을 맞고 죽은 것으로 밝혀지는 그 순간이(그것을 입술을 떨며 말하는 최진수가 밝히는 장면이) 관객들이 가장 크게 반응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앞선 관객의 의견과는 반대로 나는 이 영화가 무척이나 '다큐멘터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내가 이 영화에서 등장한 사람들의 증언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롯하는 차이일 것이다. 그것이 거짓(혹은 불안정한 진실)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영화 <김군>은 '영화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증언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영화가 무척이나 '다큐멘터리적'일 것이다.
여기서 처음의 질문으로, 그러니까 '다큐멘터리'란 무엇이고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것으로 되돌아가본다면, 나는 그 단어들의 본래의 의미를 조금 비틀어서, 무척 개인적인 뉘앙스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큐멘터리'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그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영화'란 그 사건을 '작품'으로써 다루는 감독의 '시선' 혹은 '예술'이라고.
그런점에서, 5.18 당사자였던 인터뷰이가 운전하는 택시를 탄 인터뷰어가 그에게 과거의 그 장소를 지금 이렇게 지날 때의 심정이 어떻냐고 물어보는 장면은 핵심적인 대목이다. 그것은 이 '사건'으로서의 5.18에 감독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작품'으로 가공하는 노골적인 장면이다. 이 영화에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거기에 있다. 과거의 그곳을, 지금의 이곳과 나란히 연결시켜 공명하게 만들려는 의도. 김군을 찾아가는 '서사'도 영화적(다른 의미에서)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영화'일 수 있다면 바로 그런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 (우리는) 무얼 부르지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다시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것은 이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 자체가 원초적으로 간직한 딜레마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역시, 그 객관적인 '사건'들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직접 드러나지 않는 특정한 관점에 따라 '배열'한다. 그것은 나의 정의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차이가 뭘까, 다큐멘터리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차이라는 것은. 감독이나 연출이 관여하는 '정도'의 차이일까? 혹은 '배열'의 방법, 그러니까 미장센과 같은 것의 사소한 차이일까?
문득 내게 떠오르는 어떤 소설 작품이 있다.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이다. 이 영화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시점은 김군의 정체를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진행하는 '인터뷰어'와 같은 사람들의 시점이 될 것이다. '비당사자'이자, '현재인'인,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이 될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당사자들의 고통이 있고, 그것을 대하는 윤리적인 태도를 끊임없이 찾아가는(그러나 항상 실패하고야 마는) '우리'가 있다. 그 실패한, 원초적으로 그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그러니까 정말로 그 고통을 겪어낼 수 없는)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군>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거의 많은 부분 '과거'와 '그들'의 이야기이다. 비록 '현재'를 표현하려는 의식적인 여러 노력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런 것들이 그다지 효과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과거'들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재확인할 수 있는 나의 윤리적이어야할 익숙한 '태도'. 결국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과거에 있었던 그 비극과 무고함과 잔인함과 지금도 지속되는 뻔뻔함 등의 내용에 새삼 치를 떨고 슬퍼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재확인 이후에 또 다른 무언가를 생각해보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 시절 피가 흥건했던 그곳이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한 지금 이곳의 풍경이 된 것, 과거에 상처입은 그들의 입술이 지금도 여전히 떨리고 있다는 것, 그런 익숙한 문법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차라리 그것이 익숙하게 되어버리고만 나의 무감각함(혹은 그것을 '작품'으로 대하고 싶다는 불손한 욕망)이지 다른 무언가가 아니다.
때문에 나는 영화 <김군>이 더 '영화적(여러가지 의미에서)'일 것을 개인적으로 소망한다. 세상에는 여전히 달착륙과 지구원형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북한군 박명수'나 '평행세계의 침착맨' 같이 거의 똑같은 얼굴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장난스럽게 발견되는 와중에도 끝까지 광수 1호가 북한군 특정 인물이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진실'이라는 것은 종교 만큼이나 공허하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어하는 진실을 믿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진실'에 닿기 위해 우리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발화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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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렇다고 <택시운전사>가 될 필요는 없는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