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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30. 2019

[영화] 시민 케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Citizen Kane 1941 -오슨 웰즈

 




고전


나는 고전과 별로 친하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아온 것들, 거기엔 그 이유가 있는 것들, 시대성을 넘을 정도의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 것들. 소설, 미술, 영화, 분야를 막론하고 고전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분명 고전이라 불릴 만한 명작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은 이정표 덕분에, 지금의 예술이 그 모습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상은 별개의 문제다. '의의'라는 말을 나는 또한 달가워하지 않는데, 그것은 일단 내가 지금 느낄 수는 없지만 시대적 정황이나 문맥을 살펴 보았을 때 이러이러한 가치가 있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 는 전제를 필요로 하는 단어다. 가치가 있다면 감각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럴 수 없을 때 사람은 필연적으로 감각을 속이게 된다. '나' 이전에 이미 고전이 있었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 권위에 자신의 감각을 속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작품을 보기도 전에, 이미 그것이 좋은 것으로, 혹은 반감 때문에라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을까. 다른 작품에선 하지도 않는 괜한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시민 케인>은 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존재다. 영화를 '공부'한다는 문맥에 조금이라도 발을 들이는 순간, 그 이름을 반드시 듣게 된다(그렇다고 영화를 공부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너무나 유명하다는 것이, 내겐 분명 역효과였다. 그것은 단지 고전에 대한 막연한 반감 뿐만 아니라 더 직접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래, '로즈버드'는 썰매다. 젠장.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반전이자 서사 그 자체였다. 그런 걸 미리 알고 능청스럽게 영화를 보려고 시도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절름발이가 범인'이라는 영화와, '주인공이 유령'이라는 영화를 아직도 못 보고 있다. 언젠가는 까먹을 수 있을까봐, 헛된 희망을 품고.)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시절에 이 영화를 보았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내가 만약 로즈버드가 썰매인 것을 모른 채로 봤으면 어땠을까, 하고 자기 최면을 시도했지만 몰입하는 데 실패했다. 지금의 감각으로 보기에는 그 유명한 <시민 케인>의 미장센도 어딘지 촌스러워 보였고, '로즈버드'라는 의미심장한 단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 모자를 눌러 쓰고 돌아다니는 기자는 멍청해 보였다(그건 썰매야. 썰매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새삼 생각하기를,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 불변의 영원한 작품이란 없다는 것. 아무리 좋은(좋다고 하는) 영화라도, 관객의 사소한 경험과 편협한 취향에 의해 얼마든지 가치가 바뀔 수 있다는 것. 


스노우글로브


케인은 당시(혹은 여전히 지금도) 미국 남성의 최종 목표와도 같은 사람이다.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세계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 그 목표를 위해서는 모든 상상을 구현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하다. 운 좋게도 케인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불릴 줄도 알았다. 그는 외로운 부자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인간이기도 했다. 신문을 선택한 것은 돈과 가치, 두 가지를 움켜쥘 수 있는 영리한 선택이었다. 


영화의 문법은 이렇다. 이룰 것을 모두 이룬 사람을 보여주고, 그런 그 마저도 가지지 못했던, 아니 그 덕분에 오히려 놓쳤던 중요한 가치를 슬쩍 보여주는 것. 그 가치는 바로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소중한 썰매. 죽는 순간 놓쳐서 깨져버린 '스노우글로브' 안의 풍경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날의 자신. 완성되지 못하는 직소퍼즐의 잃어버린 한 조각. 


대처와 케인의 부모가 오두막 안에서 케인의 양육과 유산에 대해 언급하는 동안, 창문 밖으로 여전히 눈을 맞으며 뛰어놀고 있는 어린 케인의 모습은 분명 스노우글로브의 직접적인 형상화이기도 하다. 그런 입체적인 미장센도 의미심장하기는 하다. 그러나 현재의 나에게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누구도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고(한 번 더 꼬아 생각해서 그렇게 여길 수는 있어도), 어린 날의 추억과 순수한 생활의 가치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새삼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가공된 서사도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 같은 위기감도, 수잔의 오페라의 좋고 나쁨에도 공감할 수 없는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 영화를 보아야 할까.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유일하게 들었던 궁금증은 이 영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문득 그런 것이 궁금했다. 흑백영화를 만들던 시기의 사람들은, 색을 표현할 수 없는 그들 영화의 특징을 기술적 '한계'라고 생각했을까? 혹은 사진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기해서, 색이 존재하는 영화 따위를 상상할 겨를조차 없었을까.  


유성과 무성영화와 마찬가지로, 흑백과 컬러영화는 전혀 다른 장르인 것 같다. 오로지 명도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하는 흑백영화는(특히나 그런 시절의 영화는), 빛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빛과 그림자, 그것들이 곧 색깔이었기 때문에 흑백영화를 보다 보면 빛이나 그림자 자체가 하나의 물질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시민 케인>은 특히나 두 가지에 예민한 영화다. 시작부터 강조되는 뿌연 실내를 가르는 빛줄기와, '로즈버드'를 찾아다니는 기자의 얼굴에 항상 드리운 그림자. 노래를 더 이상 부르고 싶지 않다며 절규하는 수잔을 자신의 그림자로 덮어버리는 케인의 모습은 가장 인상적으로 그것을 이용한 장면이기도 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그것을 한계로 인식하기보다는 '영화' 그 자체의 특징 중 하나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것 같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색깔과 소리의 영상물에 익숙했던 나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어떤 감수성이, 그때는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지금의 내가 보고 있는 <시민 케인>역시 <시민 케인>과는 다른 작품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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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케인의 아방궁, 제나두에 있는 거대한, 거의 하나의 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벽난로다. 거기선 장작이 아니라 뭔가 굉장한 것들이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도 걸어들어가 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누구나 막대한 부와 거대한 집을 연결시켜서 상상한다. 그리고 너무나 넓은 집 안에서 소리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서로의 목소리. 


- The End. <라라랜드>에서도 봤었지. 거의 같은 글씨체로. 


- <카메라 루시다>에서 롤랑 바르트가 언급했던 것처럼, 흑백영화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이젠 그들이 이 세상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느낀다. 저 중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혹시나 있을까?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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