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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un 04. 2019

[영화] 하나레이 베이

'종이인형들의 습작'

Hanalei Bay 2018 - 마츠나카 다이시





소설


일본의 영화는 소설같다. 많은 영화들이 그렇다.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영화들도 많고,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와 진행, 사물과 배경의 묘사등이 지금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주도록 만드는 경우가 잦다. 그것이 그들의 영화적 문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또한 그렇다. 내레이션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이 영화는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영화의 도입부터 거친 장면 전환이 눈에 띄었다. 서핑을 하러 가는 남자, 숙소, 음악, 울리는 전화, 시신의 확인. 음악과 소리, 정서의 흐름까지 뚝뚝 끊겨서, 어쩐지 좀 바쁘고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감상적인 내레이션보다는 선호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묘한 어색함과 기시감이 동시에 들었다. 분명 영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어딘가 익숙한 문법.


이것을 영화의 '몽타주 기법'이라기보다, 소설의 '행갈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영화를 보니 좀 더 그럴싸해진다. 툭툭 바뀌는 장면들을 보며 몇 개의 문장들이 절로 떠오른다. 분명, 이것은 소설의 문법이다. 영상화된 문장들(알고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다)이다. 


이 영화를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이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그 정적인 움직임들(심지어 바에서 시비를 거는 미국인조차도)이 이해가 간다. 하나뿐인 아들이 죽은 하와이의 섬에 10년 동안 주기적으로 찾아가 해변에서 책을 읽는 여자. 영화적으로는 어색할 수 있지만 소설적으로는 익숙한 설정이다. 그것이 영상(일종의 '실사화'라는 생각도 든다)으로 표현된 문장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분명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도 나름의 맛이 있을 것이다.


습작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 소설이 습작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이 영화의 원작인 하루키의 소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원작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하루키의 냄새가 이 영화에선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몇 가지 개연성의 문제들(작중 설정된 29년의 세월동안 주름이나 티끌 하나 변한 것이 없는 주인공, 10년 간 하와이를 주기적으로 찾아가는 주인공의 재력 혹은 설득력 등)은 일단 제쳐두고, 가장 어색했던 것은 인물들의 생기였다. 


그들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의 생기가 없었다. 단지 특정한 대사, 그리고 행동을 어떠한 상황에서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 작위적인 의도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그럴싸한 타이밍에 한 마디 던져주는 날카로운 대사('잊어버리는 것보단 까먹는 것이 낫죠') 같은 것은 뭐랄까, 타이밍도 노골적이었지만 그 사유도 얇았다. 죽은 아들이 지냈던 숙소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두 팔을 덩그러니 늘어뜨린 채 어색한 농담을 티격태격 주고받는 두 미국인 친구들이나, 주인공 사치의 근처에서 '아들의 손도장을 가져가라' 같이 하나마나한 말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미국인 아줌마와 아저씨, 사치에게 일종의 깨달음을 던져주기 위해 하와이까지 날아온 것이 분명한 두 일본인 남자애들까지. 이들이 '소설적'으로 특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 그 재봉선을 서사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그렇지만 결국 영화 전체의 파동에 포섭되는) 인물적 특징이나 에피소드 같은 것들로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고야 마는 것, 그리하여 결국 클리셰적인 뻔한 장면들로 치닫고야 마는 것(아들의 손도장 위에 툭툭 떨어지는 눈물), 그러한 것들이 습작 소설들의 특징이다.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눈에 보인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그 섬을 매년 찾아가는 사치(그녀에게 있어 남편도, 자식도, 애초에 사랑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없는 대상일 뿐이었다)와 그녀가 그 슬픔을 대하는(혹은 실감하는) 나름의 방법을 찾아내는 결말. 그리고 그 다음의 시간(어떤 웃음). 


그런데 관객에게는 그러한 감정을 곱씹어볼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방인>의 뫼르소적 인간처럼 보이는 초반의 사치에겐 감정적으로 걸 수 있는 갈고리가 없고, 그녀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그 배경(마약을 하다 죽은 때리는 남편과 무신경하고 이기적인 아들)에는 설득력(어째서 그런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랑 결혼을 했을까)이 없으며, 그런 그녀가 선택한 행동들에는 매력(미학적인)이 없다. 아들이 죽은 해변에 의자를 놓고 바람을 맞으며 소설책을 읽는 그 설정은 분위기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치'라는 인물이 선택할 것 같은 행동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짧게 만난 그녀라면, 아마도 피아노와 관계된 무엇을 중심적으로 했을 것이다(그녀에게 있어서 피아노란 무엇이었을까, 교복을 입고 피아노를 치던 어린시절의 그녀가 뭔가 더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그나마 영화에서 어떤 감정이 집약되는 후반에는, 뻔한 타이밍과 분위기의 음악으로 관객의 감정을 드리블하려는 촌스러운 시도도 있었다. 지나치게 많이 쓰인 클로즈업(커튼, 모래, 발목, 해변의 풍경)들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가장 아쉬운 것은 아무래도 위로의 방식이다. 아들을 잃은 사치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에게 위로를 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주변의 죽음들을 주섬주섬 꺼내든다. 그것이 그녀의 어떤 고통을 조금이라도 마모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처럼. 그런 말들이 그녀에게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애초에 그녀의 고통은 '아들을 잃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소중한 것이었음을 실감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매력적인 포착이지만, 그런 얕은 위로와 일본 특유의 소년만화적 건전함이 느껴지는 몇몇 대사들(주로 서핑을 하러 온 남자애가 던지는)만으로 치유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마지막에 돌아보며 웃는 사치의 그 웃음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오열도, 꼼짝 않는 나무를 밀어내려는 안간힘도, 파란 손도장 위로 떨어지던 눈물도. 


인물들은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이인형이 아니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것이고, 어떤 버릇이나 말투, 스케쥴, 감정, 성격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보기좋게 주인공의 서사나 영화의 사유를 위해 일직선으로 깔린 징검다리나 계단과 같은 존재들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레이 베이>에서 사치를 제외한 인물들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순순하다. 사치 또한 분명 매력적일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얕게 마련된 그런 무대들로 인해 빛이 바래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명력. 그것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그것을 잃었다는 슬픔에 공감하지 못했고, 영화가 결국 다시 그것을 얻었을 때 나는 나풀거리는 종이인형 한 장을 무심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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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카우아이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네 개의 섬 중 내가 선택한 섬이었고, 어딘가의 해변에 상어에게 물려 다리를 잃고도 재기에 성공한 서퍼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 역시 거기서 모티브를 얻은 건 아닐까. 


- 카우아이 여행 중 먹구름이 잔뜩 낀 해변에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두 외국인 청년들을 본 적이 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절망과, 기다림의 표정. 한 사람은 해변의 모래에 풀썩 앉아 있었고, 한 사람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 있었다. 소방차 같은 것이 었었던 것 같고, 구조대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출현과 상관없이 두 사람은 도저히 사람이 들어가선 안 될 것 같은 파도치는 어두운 바다만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초지정은 모르지만, 일행 중 보이지 않는 나머지 한 사람이 저 어두운 물 속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안타까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 먹을 것으론 사치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가 나왔다. 이 영화는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여지없이 여기서도 도마질  장면이 나왔다. '일본영화에는 높은 확률로 도마소리가 들린다'는 막연한 지론이 묘하게 또 증명이 되어버렸다. 도마를 사랑하는 사람들. 개인적으로는 사치가 가져온 봉투에서 샌드위치가 아니라 스팸 무스비 같은 것이 나왔으면 했다. 


- 서핑장면 하나만큼은 그래도 매력적이었다. 액티브한 걸 싫어하는 나조차도 한번쯤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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