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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un 14. 2019

[영화] 갤버스턴

'누구에게나 에덴이 있다'

Galveston 2018 - 멜라니 로랑




누구에게나 에덴 동산이 있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고, 슬픔보다 행복을 얻는 것이 당연한 세계. 소중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한 곳. 배를 곪지 않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무언가를 배워서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곳.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 그것은 대체로 '유년시절'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어린 아이라면, 자라나는 청소년이라면, 꼭 보장되어야할 그런 세계.


그러나 그러한 세계에서 추방당한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몸을 팔아야 하는 사람, 누군가를 죽이고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사람, 새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사람, 겨우 세 살 때 부모도 가족도 모두 잃어버리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남겨진 아이. 그러면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에덴 동산은 있어야 했다. 


HELL IS REAL


에덴을 가지지 못했던 그런 사람들에게 세계는 그저 지옥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게 주어지는 그 사소한 행복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그들이 '카인'처럼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났는지, 아니면 쫓겨났기 때문에 손에 피를 묻히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로이도, 록키도, 어쩌면 티파니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들은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지옥의 한가운데 있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과 고통의 위협 속에서, 그들이 택하는 선택들에는 도덕적인 비난을 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로이처럼 나름대로 나이를 먹게 되어도, 록키처럼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가 있어도, 티파니처럼 어린 아이라도, 결국 다가오는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들의 희망과 의지와는 다르게 외부의 위협은 온갖 변수를 활용해가며 그들을 쫓는다.


그들의 도피는 외나무다리를 걸어가는 것처럼 불안하다. 당장 그들의 몸에 총을 겨누는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차를 바꿔타고 도로를 달리면서 시작된 그 여행은 그 끝을 장담하기 힘들다.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적당한 모텔에 몸을 숨기고 그들이, 혹은 또 다른 불행이 자신들을 찾아내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런 종류의 악몽을 꾼 적이 있다.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돈 내 뒷모습을 추격자가 본 것이 분명했을텐데도, 나는 그저 근처의 책상 아래에 황급히 몸을 숨긴다. 숨을 곳이라고는 그 책상 하나뿐인 막다른 방안에서,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른 채. 모래더미에 머리만 박고 숨은 줄 아는 타조처럼. 


추격자들이 쫓아오기 전, 외딴 곳의 모텔에 잠시 몸을 숨긴 그들에게 약간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곳에서 그들은 불온하게도 희망을 품는다. 어쩌면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에서 사람들과 당구 한 번 치는 것조차 꺼려하며 극도로 긴장하던 로이도 두 사람을 데리고 바닷가로 갈 만큼의 여유를 부린다. 잠깐의 갈등이 있었지만, 전 여자친구에게 거부당한 채 숙소로 돌아온 로이는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는 자신에게 간신히 남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시한부 인생의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게 된다. 


그는 록키와 티파니에게 '에덴'을 선물하고 싶었다. 평범한 학교에 가서, 공부를하고, 자신의 재능을 찾아서,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가장 평범한 삶, 두 사람에게 원래 주어졌어야 했을 에덴 동산. 그는 그저 무사히 도망치는 것을 넘어서, 더 과분한 것을 꿈꾼다. 보스를 협박해서 돈을 마련하고, 록키와 티파니의 정체를 알아차린 옆방 좀도둑을 죽여서, 그녀들만이라도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시도는 실패한다. 결국 추격자들은 그들을 찾아낸다. 자신이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록키의 죽음을 목격한 로이에게 찾아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여생이다. 만약 자신이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의사의 설명을 들었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로이는 아이러니하게 주어진 그의 여생을, 마지막으로 티파니를 위해 쓰기로 한다. 20년 뒤에 자신을 찾아온 티파니는 좋은 가정에서 자라 자신의 재능을 찾고 원하는 삶을 살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 티파니는 마침내 아주 작은 자신만의 에덴 동산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로이는 결국 그곳에 도착하지 못한 채 죽어버린 록키를 여전히 기억한다. 그녀의 몫의 슬픔을 위하여, 그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밖으로 나선다. 


모텔, 옆방, 사소한 시간  


지옥같은 삶의 폭풍우를 뚫고 도착한 갤버스턴은 고통이 잠시 유예되며 도래하는 찰나의 에덴이다. 그 해변에서 보내는 짧고 행복한 시간들(모래에 벌렁 누워있는 로이의 모습이 좋았다), 물가에서 활짝 웃는 록키와 티파니의 모습들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그 순간은 세 사람의 어두운 삶에 작은 빛처럼 남게 되었지만, 사실 내게 더 인상깊게 남았던 것은 바로 그들이 도망치며 머물렀던 좁고 누추한 공간들이었다. 록키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새벽의 자동차 안, 새의 둥지처럼 로이의 몸을 담은 푹신해보이는 소파, 언제든 서로의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모텔의 두 방. 그곳의 어두운 조명. 


그런 장소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정리하는 곳이다. 어떤 파국이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몸이,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내뱉는 곳이다. 완전한 남이었던 두 사람이 천천히 가까워지는 공간이며, 감정을 추스린 그들이 다음날 또 다른 곳을 향해 발을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내게는 그 공간들이 대놓고 밝게 반짝거리는 그 해변의 풍경보다 좋았다. 해변 뿐만이 아니라 그 모든 공간들이 아마도 '갤버스턴'이겠지만. 


20년 후


1년 후, 10년후, 이런 류의 진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단어들을 보면 몰입감이 확 떨어진다. 특히 실시간으로 쭉 진행되던 영화가 마지막에 갑자기 덜컥 그런 도약을 할 때(<라라랜드>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이 나름의 형식이 있으면 괜찮겠지만). 


23살이 되어 찾아온 티파니의 목소리가 그리 반갑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티파니를 충분히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티파니는 뭐랄까, 그들의 여정에 마스코트처럼 따라다닐 뿐인 귀여운 아이였다. <알라딘>의 아부나 <겨울왕국>의 올라프, <라푼젤>의 파스칼 같은. 로이와의 추억도 단지 해변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치고 도망가는 그 정도의 에피소드 뿐이었다. 


영화는 로이와 록키의 관계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 관계가 비록 '남자 주인공의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시체가 되는 역할로 소모되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티파니는 그냥 쫄쫄쫄 따라다니는 요정 같은 존재로 묘사되어버렸는데, 때문에 성장한 그녀의 증언들이 로이와 함께 했던 그 꼬마 아이의 증언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60세 노인이 된 로이와, 행복하게 성장했지만 자신을 버리고 간 이유가 궁금했던 티파니가 서로 나누는 대화들도 좀 예상가능한 것들이었고, 그 뻔한 종류의 마무리를 위해서 '20년 후'라는 도약을 통해 굳이 그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좀 사족 같기도 했다. 로이와 록키 뿐만 아니라 로이와 티파니, 록키와 티파니 사이에도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으면 했다. 기왕 마지막에 23살의 티파니가 등장할 것이었다면. 


여전히 그들은 폭풍우 속에 있다. 영화는 폭풍우로 시작해서 폭풍우로 끝난다. HELL IS REAL이라는 문구에서 삶이 끝날때까지 결국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레미제라블>을 생각한다. 장발장과 팡틴은 그들의 삶 안에서는 구원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따뜻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코제트에게 넘겨진 행복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와 많은 것이 닮은 이 영화 또한 행복의 몫을 티파니에게 넘겨주었다. 그렇다면 고통만 가득했던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것에 대한 답은 제목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은 여전히 <갤버스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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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프한 느와르 분위기의 세계관에서 묘하게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여관주인이 무척 매력적이었는데, 그 얼굴을 보면서 굉장히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양희은과 꼭 닮았다. 그녀의 존재가 무척이나 든든했다. 


- 인상 깊은 음식은... 음식이라 할 순 없지만 바로 '담배'. 수 많은 인물들이 쉬지도 않고 담배를 열심히 피운다. 새삼 낯설게 보면 그 연기나는 종이말이를 특정한 타이밍에 입가에 가져다대는 행위가 묘하게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흡연자는 아니지만 담배란 것은 '타이밍'으로 피우는 물건인 듯.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이 항상 있다. 어떤 공백을 연기로 채우기 위하여. 그 공백이란 아마도 감정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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