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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루스 Sep 20. 2017

정말로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지금 그 느낌이 답이다 / 바스 카스트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정말로 좋은데 말로 표현하긴 어렵다. 혹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왠지 이건 정말로 아닌 것 같다는 느낌. 이 책은 바로 그런 '느낌'에 대해 파헤친다. 흔히 우리가 '이성'이라고 말하는 그 반대편에 있는 이성 아닌 것들(이 책에선 모둠으로 '비이성'이라고 이름붙인)에 대한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를 쫓는다. 맞다. 놀라울 것도 없이 이 책의 저자는 기자다. 과학전문기자.


책은 저자 스스로 유명한 뇌과학 연구소를 찾아서 스스로 머리 속에 전극을 꽂고 전기자극 실험을 체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기 자극을 통해 이성을 마비시켰을 때, 과연 우리는 좀 더 창의적일 수 있을까?


우리의 모든 교육시스템은 이성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직관, 무의식, 감정과 같은 이성 아닌 것들은 자연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배제되거나 무시되어 왔다.


우리의 모든 교육 시스템은 바로 이런 시각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욕구를 말로 표현하라고 요구한다. 언어가 욕구의 표현에 적절한 도구인지 아닌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아이가 조금 자라면 이성적 층위의 확장을 목표로 삼는 학교로 아이를 보낸다. 대학에 들어가도 배우는 것은 역시 이성적 사고이다. 우리는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진술의 논리와 근거를 마련하는 법을 배운다. 근거가 없는 것, 말이나 숫자로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배제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렇게 우리는 몇 년, 몇십 년, 아니 전 생애를 이성적 능력을 함양하는 데 다 소모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 rational animal'이다. 예로부터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쉼 없이 추구하고 보호해왔던 바로 그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때론 사진이 설문지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설문지로는 이성에만 닿을 수 있다. 이성 아래에 있는 층위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다른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사진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이 필요하다. 사진을 이용하면 언어로는 다가가지 못하는 두뇌 부위도 활성화된다. 게다가 사진은 '이미지'를 불러낸다. 사진 테스트에는 합리적 언어로 반응하지 않는다. 이야기로, 상상으로, 백일몽으로 반응한다. 즉 이미지의 언어로 반응한다. 그렇게 하여 무의식의 영역에 조용히 숨어 있던 소망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에게 말을 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사용하는 도구가 무엇인가에 따라 심리학자들이 만날 수 있는 자아의 층위도 달라지는 것이다. 설문지를 사용하면 합리적 언어를 가진 의식적 이성을, 사진 테스트를 이용하면 무의식적 자아를 만나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자아(경험자아)와 만날 수 있다.


언어 자아의 아래에는 또 다른 제2의 자아가 숨어 있다. 이 자아는 대체로 무의식적이다. 무엇보다도 말을 할 수 없다. 합리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오히려 감정으로, 우리의 몸과 행동을 거쳐 말을 한다. 그 자아는 침묵하지만 우리를 채근한다. 그것은 나를 말하지 않고 나를 실행한다.
침묵하는 자아에 대해 뭔가 알려면 에움길을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사진 테스트이다. 테스트에 참가하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이야기를 통해 나를 말하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엔 우리의 자아와 관련된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나름의 욕구 및 '동기'를 가진 우리의 무의식적 자아 말이다.


언어는 욕구를 억누르는 도구다


언어를 배우기 전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면 나도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사회적 평판이 중요하다.우리는 근본적으로 무리를 이루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를 통해 부모로부터 배운 규칙의 대부분은 우리를 사화와 융합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시 말해 무리와 사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 언어의 목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언어는 올리버 슐트하이스의 추측대로 애당초 우리의 욕구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억누르는 수단인 셈이다.


우리는 개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쩌면.. 창의적이 되려면 말을 줄이고 그림을 더 많이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의 막스플랑크연구소 소장 볼프 징거Wolf Singer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현재 주로 이성적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 우리의 교육 체계가 힘써 기르는 표현 수단이다." 그림이나 음악, 춤 같은 비이성적 표현 형식은 너무나 홀대를 받는다. 때로는 모순된 감정을 전달하기에 그것들이 언어보다 훨씬 더 적합한 수단인데도 말이다. 




일본의 뇌과학자 요로 다케시가 "인류의 역사는 뇌가 자연을 침윤하는 역사"라고 했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이성이 비이성을 구축(驅逐)하는 역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성 아닌 것들'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음에 분명하다. 


2007년에 출간된 책(번역서는 작년에 출간됨). 1막부터 4막, 그리고 앞부분의 전주(Prelude)와 중간의 간주(Interlude)로 구성되어 마치 하나의 극본을 읽는 듯 하다. 별로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오히려 어렵지 않은 내용이 비전문가인 내겐 더 많은 것을 전한다. 번역도 아주 매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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