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폰과 넛지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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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런 메일을 받으면 평소 거들떠 보지도 않던 메일함을 한번 쯤 더 쳐다 보게 된다. 뭐? 5만원이라고? 이번 달까지 쓰지 않으면 쿠폰을 잃게 된다고? 어라? 이번 달이 몇 일 안남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어떻게든 쿠폰을 쓰기 위해 악착같이 움직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할 때가 있다. 그게 뭐라고 싶지만 또 그렇지가 않다. 쿠폰 때문에 없던 관심도 생기고 지금 당장 별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종종 구입하게 된다. '멍청한 행동'인줄 알면서도 속고, 또 그렇게 속는다는 걸 알기에 한쪽에서는 줄기차게 쿠폰을 뿌려 댄다.
지난 2017년 노벨상위원회는 “경제학과 심리학을 접목시킨 공헌”을 인정해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리처드 탈러 교수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노벨상위원회는 탈러 교수의 업적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손실회피, 초기부존효과, 심리적 계정 등의 개념을 통해 의사결정자의 비합리성에 대한 연구를 체계화한 점, 둘째, 공정성이나 정의감 등 사회적 선호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킨 점, 그리고 셋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는 데서 흔히 드러나는 의사결정자의 통제력 부족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이론을 구축한 것.
*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14512.html
소위 "행동경제학"이라 부르는 이 약간은 이단적(?)인 경제학의 한 분파는 기존 정통경제학이 고수하던 '인간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엄격한 가정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는 심리학에서 가져온 이론들을 경제학에 접목시켜, 인간이 경제행위(선택과 결정)를 함에 있어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은 여러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바로 이 행동경제학을 다룬 책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이 오늘 소개할 책이다. 저자는 리처드 탈러. 앞서 소개한 바로 그 2017년 노벨상 수상자가 쓴 책이다. 사실 이 책의 초판은 2015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우리에겐 어쩌면 이 책보단 그 이전에 출간되어 국내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던 전작 ⟪넛지⟫가 더 익숙하게 와 닿을지도 모른다. 모르긴해도 이 두 권의 책이 저자가 노벨상을 수상하는데도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탈러(혹은 '세일러'라고도 부름)는 이 책에서 기존 경제학 모형 속에서 가정하는 가상의 인간을 가리켜 '호모 이코노미쿠스', 줄여서 '이콘(Econ)'이라 부른다. 이콘들은 그야말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인간이다. 한 치의 실수도 없다. 그들은 쿠폰에 속는 일도 없고 잃은 돈이 아까워 손해 난 주식을 계속 품고 있는 우를 절대 범하지 않는다.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도 늘 최선의 선택을 하고 '최후통첩게임'에서도 공정성 따윈 안중에 없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에서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행동하지는 않는다. 경제학자였던 탈러는 이런 현실과 이론과의 괴리를 인식하고 이를 경제학에 접목시키기 위해 그의 전 생애를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40년 동안, 나는 경제학 모형 속의 가상적인 존재와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껴왔다. (중략) 이콘들이 사는 가상 세상과 비교할 때, 인간은 많은 잘못된 행동들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 이는 곧 경제학 이론이 학생들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부적절한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 리처드 탈러,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中
그리고 그가 40년 동안 했던 모든 연구에 대한 기록들이 꼼꼼히 정리되어 이 한 권의 책에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행동경제학에 관한 역사책이라 불러도 좋다.
이 책에는 행동경제학과 관련된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저자의 지인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소위 '전망이론' 부터,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가상 계좌인 '심리계좌' 이론, 자기통제와 공정함의 문제, 그리고 인간 행동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 등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저자가 이 분야에서 가지는 입지를 생각할 때 어쩌면 행동경제학과 관련된 거의 모든 주제들이 책 속에 망라되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주제를, 그것도 아무리 수학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래도 악명높은(?) '경제학' 이론들을, 어떻게 대중을 상대로 쉽고 재밌게 풀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부분에서 (내 생각에) 아주 기발하면서도 재밌는 시도를 하는데, 바로 행동경제학의 역사를 시대로 구분하여 크게 여덟 개로 나누면서 각각의 시대 별로 중요한 주제들을 서너 개씩 골라 배치하는 방식으로 책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모두 저자가 논문으로 발표했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한 주제들이다)
여기에 각각의 주제마다 그 주제와 관련된 에피소드, 특히 그 당시 저자가 무슨 생각을 했고 왜 그런 생각을 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와 만나 어떤 고민을 했는지 하는, 저자 개인의 이야기가 함께 소개되어 있어 읽는 이의 마음에 부드러움을 더한다.
게다가 조금 난해하고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경제학의 특성을 감안, — 아무리 '행동경제학'이라 해도 경제학은 경제학이다 — 딱딱한 제목 대신 흥미를 북돋우는 제목과 소재들로 책을 구성했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법경제학의 대표적 주제 중 하나인 코즈 정리(Coase theorem)를 행동경제학에 맞춰 풀어내는 장(27장)에서는 저자가 한 법경제학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코즈 정리가 들어맞지 않는 사례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에 따른 학회 참석자들의 반응을 마치 생중계라도 하듯 생생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장 제목을 "법경제학 컨퍼런스에서 일으킨 반역"이라고 붙이는 식.
대학교 때 경제학을 배웠지만 그리 깊게 빠지진 못했다 — 그 당시엔 행동경제학이라는게 있는 줄도 몰랐고 '새무앨슨 경제학'이 바이블처럼 읽히던 때였으니. 사회에 나가서도 경제와 관련된 일을 했지만 학부때 배웠던 경제학 이론이 뭐 그리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배웠던 책들 속에 등장했던 여러 주제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게다가 그 주제들이 옛날과 똑같은 옷이 아닌, 인간(심리학)과 만나 '새로운 옷'을 입고 다가오니 그 반가움은 더할 밖에. 책 속 곳곳에 언급된 경제학자들은 하나 같이 모두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석학들이자 그야말로 '대가'들이다. (어림잡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절반은 이 책 속에 등장한다) 이런 석학들과 함께 평생을 오로지 경제학자로만 살아 온 저자의 인생이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사실 이 책은 그렇게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도 경제학은 경제학이고 또 책 분량(600쪽)도 만만찮다. 솔직히 나 역시 아주 꼼꼼히 읽지는 못했다. 어떤 장은 듬성듬성 읽었고 또 어떤 장은 읽다가 내용이 너무 어려워 건너뛰었다 다시 오기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책을 덮지 않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이 책의 저자가 책 서두에서 교묘하게 던져 놓은 '넛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콘’이 아닌 보통의 인간은 이런 말을 들으면 왠지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오기가 생기는 법이니)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중요한 조언을 하나 한다면, 더 이상 재미가 느껴지지 않을 때 이 책을 덮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일 것이다.
— 리처드 탈러,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中
리처드 탈러가 아니라면 도저히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책.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자 영광이다.
어떤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아직 읽어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올 여름 이 책으로 행동경제학 속에 풍덩~ 빠져보는 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