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감정 시계

그 말, 지금 해도 괜찮아

by 서진

“엄마, 사실은.. 아까 친구한테 서운했어.”


휴일 저녁, 종일 외출하고 돌아온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왜? 그렇게 잘 놀고? 이제 와서?”


당혹스러움에 반사적으로 질문을 쏟아냈고,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화부터 냈다.


“서운했으면 그때 얘기했어야지!!

그걸 이제와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


한참 이어진 나의 화 섞인 잔소리에

아이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몸속 어디 시계라도 들어있는 건지,

휴일이면 아이는 유독 일찍 눈을 뜬다.

오늘은 아이 친구와 놀기로 한 날.

매일 나가고 싶어 했던 아이는 신이 났고,

나도 친구를 만날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외출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낮에 함께 마라탕을 먹고,

놀이터와 집을 오가며 신나게 놀았다.

저녁에는 369, 007 빵, 마피아게임까지.

나도 처음 해보는 게임이라 즐거웠고,

아이도 당연히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하루를 뿌듯하게 보냈다는 만족감도 잠시,

아이의 말에 혼란스러움이 몰려왔다.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걸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이의 감정 표현에 대해 검색을 해봤다.


1. 아이의 감정을 어른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2. 사건 직후엔 감정을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3. 시간이 지난 뒤, 조용한 순간에야 서운함이나 불편함을 느낀다.

4. ‘그땐 좋았지만 지금은 서운하다’처럼 복합되고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기 어렵다.

5. 감정을 말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한 줄 한 줄 읽으며,

어제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들이 얼마나 무례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용기를 꺾어버렸는지 깨달았다.


나는 아이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이의 ‘이제 말해도 괜찮은 시간이 됐어.’라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걸 ‘뒤끝’으로 오해한 것이다.

나의 반응에 입을 다물던 아이가 생각났다.


‘내가 꽉 닫힌 문처럼 느껴졌겠지.’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다.

나는 아이의 감정 시계가 어른보다 느린 걸 미리 알았어야 했다.

부모는 그 감정을 다그치는 게 아니라 기다려주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사과해야 했다.


그날 저녁,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엄마가 회사에서 찾아봤는데...

아이들은 원래 늦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대.

엄마가 그걸 몰랐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실수했어. 미안해.

엄마 이제 들을 준비됐는데,

어제 하려던 이야기 다시 해 줄 수 있어?”


“응”하며 안겨오는 아이.

아이는 여태 그랬듯 나를 쉽게 용서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화낼 이유조차 없는 사소한 것이었다.

심지어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서운함’이라 말했던 감정은,

그저 작은 섭섭함에 가까웠다.


나는 아이의 감정 타이밍도 마음의 결도

그저 내 기준으로만 재단하고 있었다.


나는 요즘, 아이의 느린 시계에 대해 배우는 중이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어른과 ‘다른 것’이라는 걸.


감정이 언제나 제시간에 도착하는 건 아니다.

그 시차를 기다려주는 일.

그게 바로 부모가 해야 할 일이고,

어쩌면 그것이 아이와 내가,

서로의 속도를 이해하고 한걸음 더 가까워지는

‘관계의 시작’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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