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잘래?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가 느끼는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 아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은 놀라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기특함,
조금만 더 천천히 자라주었으면 하는 아쉬움.
받아쓰기 공책에 찍힌 100점을 볼 때의 자랑스러움,
자는 모습만 봐도 뭉클하고 가슴 찡한 애틋함,
그리고 무엇보다 끝까지 내가 지켜야 할 존재라는 책임감.
기쁨과 행복은 물론이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감정의 밑바닥에는
‘잘 자라고 있구나’ 싶은 안도와 감사가 자리하고 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크고 작은 감정들을 차곡차곡 거치며
자라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부터 아이는 혼자 자기 시작했다.
“엄마, 나 혼자 자볼게.”
책을 한 권 품에 안고 들어간 아이의 방에서,
사락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방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며
신랑과 나는 안방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이젠 엄마가 옆에 누워있지 않아도
혼자 책을 읽고, 불을 끄고,
스스로 잠드는 아홉 살 아이.
자랑스럽고 기특한 마음 한편으로,
한 걸음 멀어지는 듯 한 서글픔이 느껴졌다.
아이의 잠자리 독립이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수면교육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
나는 아이를 조리원에서 돌아온 날부터 혼자 재웠다.
다행히 순둥 했던 아이는 낮이고 밤이고 잘 잤다.
수면교육 첫날,
아이는 20분 넘게 울다 겨우 잠들었고
신랑과 나는 방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수면교육의 효과였는지 그 후로 아이는 혼자서도 잘 잤고
50일의 기적, 통잠을 선물했다.
18개월,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감기와 열, 폐렴을 달고 살았다.
자연스레 한 침대에 잠드는 일이 잦아지다가,
결국 함께 자게 됐다.
잠들기 직전을 함께 한다는 건 생각보다 근사했다.
밤마다 나란히 누워 읽는 동화책,
휴대폰 불빛 위로 펼쳐지는 그림자놀이,
소곤거리며 하루를 나누는 이야기들.
그 모든 게 내게는 한 폭의 그림처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와 같은 기억을 공유한 아이는
크면서도 좀처럼 혼자 자려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곁을 떠날 걸 알기에,
난 기꺼운 마음으로 그 시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시간이 조금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다.
그런 아이가, 어느새 혼자 잔다.
겨우 아홉 살인데, 나는 벌써부터
살 부비며 껴안고 자던 날들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주말이면 거실 캠핑을 한다.
아이에게 “거실에서 잘래?”하고 슬며시 운을 띄우면,
아이는 좋아하며 베개를 들고 나온다.
사실 이건, 아이와 함께 자고 싶은 내 작은 꼼수다.
서로의 방을 놔두고, 거실에 이불을 펴고
다 같이 누워 수다를 떨다 잠드는 밤.
아이의 웃음과, 넘치도록 과분한 행복은 덤이다.
아침,
잘 잤다며 기지개를 켜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랑한 온기를 품은 포옹을 건넨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아이의 체온이
오늘 하루를 살게 한다.
아이의 성장은 늘 기쁨과 아쉬움이 동시에 찾아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한 걸음 멀어진 자리가 결국 내 자리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과 더 많이 기쁜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다.
서로의 온기가 그리운 날엔,
거실 한복판에서 다시 만나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멀어져 가면서도
더 단단히 이어져 간다.